2014년 12월 19일 금요일

서평 : 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

서평 : 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

*저자는 남한과 북한 이전에 유사이래 우리 민족을 일컫을만한 적절한 명칭을 찾을 수 없어 '코리아'라는 표현을 쓴다. 

1. 저자의 핵심 생각

저자는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요구한다. 코페르니쿠스 운운은 너무 자주쓰여서 식상해진 표현이지만, 원래 의미를 다시 짚어보자. 그는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가 돈다는 '천동설'에 도전하여, 지구의 중심은 우주가 아니고 단지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한 사람이다. 

그렇다. 역사의 주체가 누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론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역사는 힘있는 자들을 위주로 돌아갔다.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하는 욕망은, 언제나 그 수단으로 더 많은 물리력의 확보를 요구해왔다. 경제적 욕망은 폭력의 확보로 이어져왔다. 역사를 변화시키는 주체는 코리아가 아니다. 약자도 아니다. 노동자 계급도 아니다. 패권국이다. 역사는 패권국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예측하여야 한다. 패권국의 어깨위에서 세상을 보아야 비로소 완벽한 조망을 할 수 있다. 지하실에서 보이는 풍경과, 펜트하우스에서 보이는 전망이 다르듯이. 

그렇다고 이완용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그렇게 보라는 것이지, 그렇게 역사를 '쓰라'는 것이 아니다. 패권국 중심으로 바라보아야 정확히 보인다는 것이지, 그렇게 '생각'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당신의 '가치관으로 삼으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보는 것은 판단하는 것의 시작일 뿐이다. 그래서 더더욱 정확하게 보아야 한다. 그 냉철한 분석을 토대로 우리의 선택지를 예측하고, 결정해야 한다. 


2. 대-분단선을 따라 춤추는 한국 역사

코리아 민족에게 있어 분단은 낯설지 않다. 유사이래 북쪽에는 (고)'조선'이 있었고, 남쪽에는 '한국'(마한/진한/변한으로 대표되는 국가들)이 있어왔다. 조선의 멸망 이후의 한사군 설치, 이후 고(구)려와 백제/신라의 대립, 신라주도 통일 이후 당나라의 침략, 발해의 등장, 고려의 재통일과 거란/여진과의 대립, 몽골의 침략, 조선의 건국과 명/여진과의 대립, 임진왜란, 청나라의 침략, 열강의 침략과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이후 휴전선까지 반도를 둘러싼 영토분쟁은 끊이지 않았다. 분단선은 낙동강, 금강, 한강, 임진강, 대동강, 청천강, 압록강을 따라 끝없이 움직였다. 분단은 우리에게 있어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왜 그러한가? 코리아가 반도국가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구분에 따르면 대륙-농경(중국), 대륙-유목(유목민족-러시아), 해양-일본, 해양-서양의 4가지 세력의 패권이 부딫히는 곳이 코리아다. 고조선이 강성했을때 대동강 유역부터 요동, 요서, 산둥반도를 영향권에 두었다. 고구려 또한 요동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요서를 위협했다. 고려와 조선초기에는 요동경략을 눈독들였고, 실제로 옛부터 요동에는 많은 코리아인이 살아왔다. 요동은 중국 본토를 향한 전초기지이다. 그러므로 통일된 중국은 절대 코리아를 가만두지 않고, 압록강 이북으로의 진격을 허용하지 않고, 대대로 조공을 받아왔다. 유목세력의 입장에서도 중국본토를 제대로 경영하려면 반도의 코리아세력을 그대로 두어선 안 된다. 

해양세력은? 일본의 발흥은 임진왜란때 가시화되었지만, 사실 7세기부터 그들은 제국을 꿈꾸었다. 당중심의 중화세계관을 본따 일본중심의 세계관이 확립되었고, 임나일본부라는 거짓된 기록도 그즈음에 날조된 것이다. 일본의 몸은 섬에 묶여있었지만 생각은 언제나 세계를 향해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은 코리아 반도를 다리로 하여 중국을 점령하고, 나아가 인도의 정벌을 최종목표로 하였다. 그야말로 당대의 관점에서의 '세계정복'이다. 그리고 그 물리력의 바탕은 서양에서 전래된 '총'에 기반하였다. 결국 그들은 20세기 초반에 조선합병에 성공하고 중국경영에 참여하게 된다. 뒤이어 동남아시아를 아우르는 태평양 대제국을 (잠깐) 건설한다. 하지만 또다른 해양세력인 서양세력, 당시의 미국에게 크게 얻어맞고 2차 대전은 끝난다. 

이후의 현대사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하다. 승전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논의, 초강대국인 미-소의 신탁통치 논의, 결렬, 남침, 전쟁, 종전, 민주화, 독재정권의 등장, 민주화. 이러한 역사적 흐름과 영향권의 확대의 뒷배경에는 해양과 대륙이 치열한 다툼이 있어왔다. 


3. 역사의 교훈

몇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얻어간다. 

첫째, 예견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란 없다. 
여기서의 예견은 점쟁이처럼 모년 모월 모일에 전쟁이 터진다는 수준이 아니다. '거대한 세력들의 힘이 움직이는 방향'을 보면 역사의 흐름이 예측된다. 늘 그래왔듯이,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강성해진 중국은 코리아를 압박한다. 중국이 약해지면 코리아의 영향권은 북으로 넓어진다. 

둘째, 그러므로 정확한 정보와 냉철한 판단이 중요하다. 
미국을 예로 들어보자. 하나는, 1942년 미국은 코리아의 독립세력에 대하여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친공산적인 소련내 군사세력, 중국에 있는 친 국민당적 임시정부, 이승만을 위시한 친미세력과 한국내 하급관리로 일하는 코리아인이 있음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섣불리 임시정부를 승인시키면 다른 세력들의 반발이 예상되므로, 신탁통치를 통하여 시간을 벌고, 전후의 행정은 일제하의 관리들에게 맡기는 방향을 염두에 두었다. 다른 하나는,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미국은 한반도, 대만해협, 베트남, 동남아, 중동, 서유럽 등 세계 각지에서 공산주의의 위협에 시달렸다. 설상가상으로 세계대전 이후 군비를 줄여야 한다는 여론이 국내에서도 비등하였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비도덕적인 공산주의 세력과의 전쟁'이었고, 그 전쟁은 반드시 공산주의 세력이 시작해야 하는 것이었다. 애치슨 라인은 한반도를 제외한 채로 그어졌고, 소련의 허락과 중국의 동조하에 북한이 전쟁을 시작하였으며, 미국은 대응시나리오에 맞게 자유세력의 연합체인 세계연합(UN)의 이름으로 응전한다. 한국전쟁을 제물로 서방세계는 국내여론을 잠재우고 군비를 다시 확장하였고, 중국의 침략은 대만해협에서 멈췄으며, 동남아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은 강하여졌고, 태평양의 보루인 일본은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셋째, 그러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길러내야 한다. 
중국인들은 임진왜란 후 조선의 쇠약원인을 세 가지로 꼽았다. 첫째는 국사태만, 즉 국가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둘째는 문약, 즉 국방력이 없었다. 셋째는 중국의존, 즉 자주적인 판단보다는 언제나 의존적이었다는 의미이다.
무엇보다 올바른 판단력은 정치엘리트에게 필요하다. 엘리트가 국사태만의 자세를 버리고, 국방력을 튼튼히하며, 자주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 그러나 저절로 되는 것은 없다. 귀족국가에서는 귀족 중에서, 군사독재에선 군부에서 엘리트가 나왔지만, 민주국가에서는 당연히 시민사회에서 엘리트 즉 지도자가 나온다. 결국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육의 힘이고 이들을 길러내고 뽑아내는 선거제도의 공정성이 중요하다.

넷째, 국민들이 정신차려야 한다. 그리고 리더십의 내용이 중요하다.
코리아 국민들이 위와 같은 세계적인 흐름을 알고 있어야 한다. 지역감정이나 소수자 혐오, 빨갱이 혐오 등에 기대어 사욕만 챙기는 사람을 뽑아줘선 안 된다. 대륙과 해양의 사이에서 며칠, 몇개월, 몇 년사이에 세력균형이 바뀌는 시대에 우리 코리아인은 늘 살아왔다. 너무 피곤한 환경에 있기에 아예 신경 끊고 살고 싶은 것이 현실이지만, 그러는 순간 위기는 찾아온다.
어찌보면 우리 국민들은 세계적인 위협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조상들 중 일부는 스탈린에 의하여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하였고, 일부는 북한에, 일부는 조선족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누군가는 사할린에, 누군가는 일본에, 미국에 흩어져있다. 성공을 위하여 간 사람도 있지만 비극적으로 흩어진 가족도 많다. 핵심은 리더십이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에 비추어, 코리아가 세계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코리아가 번영을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목표를 설정하는 리더가 나와야 한다. 


4. 맺으며

국내적인 사건은 세계적인 사건과 맞닿아 있다. 그 흐름에서 벗어난 돌발사건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큰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당나라의 후방이 안정되면 동쪽의 코리아를 침략하고, 일본의 힘이 강해지면 코리아를 침략하며, 미-소가 화해하면 남-북관계도 좋아지고, 중국이 미국의 힘을 위협하면 미-일-한 삼각동맹이 강해져서 북한이 중-러에 가까워지는 식이다.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흐름을 읽는 것이다. 둘째는 그 흐름위에 올라 타는 것이다. 셋째는 그 흐름을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아무런 준비없이 들어가면 익사한다. 흐름의 방향을 읽고, 흐름에 적응한 다음에 생존과 번영을 도모한다. 일본은 이런면에서 철저하다. 이미 도쿠가와 막부시대부터 유럽과 교류하고, 지금도 세상에서 가장 많은 책들을 일본어로 번역해낸다. 중국은 그 자체가 이미 거대한 세계일뿐더러, 전세계로 유학생들을 보내고 있으며 그들이 다시 중국에 돌아와서 IT기업 붐을 일으키고 있다. 미국이 전세계 모든 지역의 역사/문화를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국도 이런 흐름속에서 번영했던 역사가 있다. 신라시대만 하더라도 당, 왜는 물론 동남아와 아랍권과 해상무역을 하였다. 석굴암속 부처님이 왜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았겠는가. 고려초기의 벽란도 무역도 마찬가지이다. 세종때는 군사, 문화뿐 아니라 과학의 영역에서도 세계를 주도하였다. 가깝게는 노태우의 공산권 교류 및 제3세계 교류를 시작하여, DJ가 IMF 경제위기를 극복한 힘을 바탕으로 정보통신망 및 문화의 힘을 일으켰다. DJ는 대대로 중국과 해양세력의 패권다툼의 장이었던 인도차이나 지역에 한국경제와 문화 붐을 일으켰고, 버마 문제 및 동티모르 문제의 해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북한문제의 해결과 6자회담 구상을 실현해냈다. 당시 IMF의 구조조정 요구로 빈부격차는 심하여졌으나, 4대보험의 강화와 전교조 및 공무원노조 합법화로 보완을 위하여 애썼다.
결국 세계의 흐름속에서의 코리아의 힘을 파악하고, 코리아의 역할을 찾아서 국민들을 각성시키는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우리 국민은 위와 같이 세계 경영에 참여해본 경험이 있으므로, 제대로된 지도자를 만난다면 역량을 꽃피울 수 있다.






2014년 11월 16일 일요일

탈고에 부쳐 (공익과 인권)

탈고에 부쳐 - 2014. 11. 16.

[반도체 직업병 문제,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1. 밝혀진 사실들

- 유사한 작업장에서 일하였던, 젊은나이의 노동자들이, 희귀한 병에 걸렸다.
- 그 작업장에서는 인체에 유해한 물질 혹은 그 유해성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물질을 사용하고 있다.
- 여러 사례 중 의학적으로 '확실한' 인과관계가 밝혀지기란 쉽지 않으며, 소송법칙상 인과관계의 증명책임은 노동자에게 있다.
- 작업장의 자료는 사업주나 근로복지공단에 있으나 영업비밀을 이유로 제출되지 않는 경우가 빈번하다.
- 자료가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희귀병의 발병경위를 밝히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혹은 불가능 할 수 있다.
- 노동자에게 유리한 자료 중 하나는 '통계'이다.


2. 누구에게, 어떤 책임을 지울 것인가?
- 채무불이행/불법행위 책임: 사업주에게, 사업주가 위험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던 경우
- 산재법상 책임 : 공단에게, 사업주가 위험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는지 여부는 무관함.
- 현행법상 어느 경우에나 '인과관계'의 증명은 필요함.



3. 책임의 내용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 고전적 손해배상의 내용
 =적극적 손해 : 치료비, 장례비
 =소극적 손해(일실이익) : 생존했다면(건강했다면) 얻을 수 있었던 소득
 =정신적 손해 : 위자료

- 재발방지
 =위험물질사용 금지/제한(알권리)
 =노조결성 방해금지


4. 책임 강제 수단
- 소송
- 입법


5. 생각할 점
- 어느시점에,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 현실적으로 회사측이 수용할 수 있는 정도는?
- 입법부나 시민사회가 어느 정도까지 호응해줄 수 있을 것인가?








2014년 10월 23일 목요일

서평 : <노태우 시대의 재인식> 강원택 편

서평  : <노태우 시대의 재인식> 강원택 편 

1. 노태우에 대하여

최근 노태우 전 대통령 일가가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노태우 씨의 외손녀이자 SK 회장인 최태원 씨의 딸인 최민정 씨가 해군장교로 입대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언론의 주목을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노태우 씨의 딸 노소영 씨의 인터뷰도 인상적이었다. 한편 전두환 추징금이 문제가 되었을 때, 노씨 일가의 재산분쟁 및 추징금 완납이 주목받기도 하였다. 

현재 노태우 씨 본인은 투병 중으로 외부활동을 자제하고 있다. 전두환 씨와는 달리 노태우 씨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내려질 날이 멀지 않아 보인다. 그는 12.12 쿠데타의 주역이자 5월의 광주를 무력으로 짓밟은 주역이다. 이는 대법원에 의하여 확정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편 87년 6월 항쟁과 그에 이은 6.29 선언에서 그의 역할이 얼마나 주도적이었는지도 논란거리이다. 아울러 그에 이은 87년 대선도 부정선거라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 대통령 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수천억 원 규모의 부정축재가 문제가 되었다. 

다만 이러한 과오와는 별개로 그가 대통령으로서 어떠한 직무를 수행하였는지 아울러 그 시대에 발생한 사건들의 의미를 짚어보는 작업은 필요하다. 


2. 외교, 통일분야의 업적

노태우 시대의 성과는 외교적인 성과와 통일 의지였다. 88년 집권당시 냉전기류가 약화되고 있었고 서울올림픽 개최라는 시기를 맞이하여 동구권 국가와의 수교를 서둘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냉전구도가 무너진 이후에는 소련 및 중공과의 수교를 달성하였다. 이는 시대적인 흐름을 미리 읽어내고 선제적으로 대응한 결과이다. 아울러 냉전이 약화됨에따라 한국이 자주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여지가 생겼고, 이는 도리어 외교가 국제정세뿐 아니라 국내정치의 영향을 받게 되기도 하였다(YS의 부활과 박철언의 퇴장). 

아울러 통일의지또한 천명하였는데, 흡수통일이 아닌 교류협력을 전제로 한 평화통일을 목표로 하였다는 점이 현재의 보수와는 다르다. 다만 대북정책은 국내적, 국제적으로 모두 '창구단일화'라고 요약될 수 있다. 이는 DJ때의 외교전략이 미국을 적극적으로 개입시킴은 물론 6자회담을 통한 해결책을 모색했던 것과는 다르다. 노태우 정부는 '자주성'을 키워드로 북미, 북일 수교도 남한을 통하여 할 것을 압박하였다. 아울러 국내적으로도 민간교류나 경제교류를 막고 공안탄압을 하였다. 이는 대화창구를 단일화하여 변수를 최대한 줄이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다만 대북정책을 강화함에 있어 남한의 '힘의 우위'를 강조하고 '북한의 외교적 고립'을 유도하였다. 이는 북한을 압박하여 대화의 테이블로 나오게 하기 위함이었고, 노태우는 이를 '원교근공'이라고 표현한다. 즉 북한과 친한 국가와 수교함으로써 북한을 압박해낸다는 방식이다. 구체적으로는 남한이 소-중과 수교함에 따라 북한에 대한 무기지원을 중단시켰고, 북한의 미-일 채널을 차단하여 남-북대화에 집중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적 고립이 북한의 위기감을 증폭시켜 북한이 핵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게끔 유도하였다. 

이러한 외교, 통일 정책은 '북방외교'라는 한 마디로 집약된다. 논자에 따라 그 정의를 달리하지만, 노태우는 대략 1) 동구권 수교 2) 남북 통일 3) 한민족의 생활권을 만주, 연해주, 시베리아로 확장하는 3단계 구상을 하고 있었다. 이로써 한국이 동북아시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나라가 되길 희망하였다. 노태우의 이러한 민족주의적인 성향은 평시작전권 환수, 용산미군기지 이전 검토, 미군기지 골프장 환수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유화책은 보수의 분열로 이어졌다. 냉전세력 상당수는 노태우나 박철언과는 달리 여전히 적대적인 대북관을 견지하였고, 보수세력 내부에서도 공공연하게 반발이 있었다. 즉 극단적인 친미-반북세력이 정부와 다른 의견을 표출하였고, 이는 레임덕이 가속화된 92년말에 훈령조작 파동에 이르러 정점을 찍었다. 이러한 흐름은 남한이 이미 북한을 압도하였다는 자신감에서 비롯하여 대화보다는 대결을 통한 통일을 선호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특히 세계속의 한국을 인식함에 있어 기존에는 남과 북의 민족문제 해결을 우선시하였으나, 동구권 몰락과 이어진 세계화에 이어 세계속의 한국의 위상이 높아짐에따라 '굳이' 민족문제를 애써서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북한을 고립시켜서 괴멸시키는 것이 낫다는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뉴라이트로 나타났으며 현재 보수정당인 새누리당의 주류적인 사상 또한 이에 기반한다. 


3. 국내정치와 경제문제

87년말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노태우는 88년 초 총선에서의 압승 또한 예상하였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6공화국은 여소야대 국회로 시작하였고, 그리하여 90년 1월 삼당합당이 이뤄지기 전까지 노태우 정부는 정국 주도권을 야당에 내준채로 시작하였다. 이는 야당이 주도가 된 5공 비리 청산 요구, 광주학살 청문회 등으로 이어진다. 아울러 여야합의를 통하여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점진적인 입법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은 고비때마다 법률안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5공 관련 증인소환과 관련된 국정조사법, 노조활동의 자유의 범위를 넓힌 노조법 등에 대하여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이렇게 정국운영에 어려움을 겪은 노태우는 3당 합당을 통하여 정계를 재편하였다. 이로써 지역구도를 공고히 하여 정당의 정책대결은 현재까지 요원해졌으며, 국민이 정치불신 또한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노태우는 표면적으로는 시민사회에 유화적인 정책을 사용하였는바, 원칙적으로는 그의 이해는 정확하였다. 그러나 일정한 범주를 넘어서는 활동, 즉 민간의 통일운동이나 불법적인 노조활동, 특히 전교조 활동은 극렬하게 탄압하였다. 다만 노조활동이 합법적이기 어렵다는 것은 현재까지도 증명되고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그는 적어도 관변단체를 정부의 영향력 밖에 놓아두려고 노력하였고, 노조의 '임금' 투쟁은 어느정도 눈감아주었다. 특히 공권력을 동원한 선제적인 노조탄압은 거절하였고 이는 회사의 자체적인 경찰력의 등장 즉 구사대의 등장을 불러온다. 

특히 경제문제에 있어 노태우 시대에는 관치금융의 부작용을 없애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중화학공업에서 첨단산업으로의 전환을 모색하고 이공계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하였다. 과거에는 국가가 금융을 통하여 경제인들에게 일정산업분야로의 투자를 유도하였는바, 이는 장기적으로는 기업의 경쟁력을 좀먹고 중복투자의 문제를 야기하였다. 다만 금융 자율화 조치에 못지않게 외자유치에 일정한 제한을 두었어야함에도 이를 소홀히하여 향후 IMF 사태의 씨앗을 심기도 하였다. 

아울러 노태우 시대는 세계적인 흐름에 따라 급격한 경제성장이 계속되었고, 중산층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다만 노태우 정부는 적극적인 재분배정책을 사용하기보다는 임금의 상승을 통하여 복지요구를 억눌렀고, 복지정책 또한 대기업중심으로 펴나갔다. 특히 사회보험에 있어 사회보험에 가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만 혜택을 준다는 것을 기본으로 하여, 사각지대의 문제를 야기하기도 하였고 이는 현재까지 이어진다. 특히 노태우 정부는 빈곤정책에 배정된 예산은 오히려 축소하는 악업을 남기기도 하였다. 다만 의료보험의 보장범위확대(농어촌, 도시자영업자)는 주목할만한 성과이다. 

한편 노태우 정부는 인천국제공항, 광양항, 서해안 고속도로, 경부고속철 개발, 국민임대주택 200만호 건설 등 SOC 투자를 공격적으로 하였다. 이는 여야를 막론하고 칭찬받는 대목이다. 


4. 정리

노태우는 DJ와 같이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형 리더라기보다는 최소한 시대에 '역행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애쓴 리더였다. 그는 국내적으로는 민주화 국면에서 6.29 선언을 이끌어냈고 전두환 세력의 복귀를 막고 선거를 통한 정권이양을 도모하였다. 다만 그 역시 5공의 주역이었으므로 5공 청산 요구에는 소극적이었고 그의 세계관에서 어긋나는 시민사회의 요구인 통일운동이나 노조운동은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국제적으로는 동구권 붕괴에 앞서 북방정책을 수립하고 동구권 국가와 선제적으로 수교한 업적을 남겼다. 북한에 대한 적대적 감정에 앞서 평화통일이 현실적인 해법임을 인지한 그의 인식은 높이 평가할만하지만, '창구단일화'는 결과적으로 시민사회의 통일노력이나 미국-일본의 접근을 제약하였고, 북핵개발을 저지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다만 그와는 별도로 한민족의 생활권을 만주 등 북방으로 넓혀야 한다는 적극적인 전략과 친미의존적인 외교전략을 거부한 것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노태우 시대는 국내외적으로 전환기에 있었다.
그는 이러한 전환기의 요구를 수용하고, 점진적인 방향으로 한국을 이끌어간 지도자였다. 적어도 시대흐름에 역행해서는 안 된다는 압박감은 있었다.
그 시대가 만들어낸 모습들은 87년 이후 대한민국 사회의 '원형'을 제공하였다. 




출처 : 연합뉴스

2014년 8월 5일 화요일

'맹자'를 읽고 - 도덕적 행위의 가능성과 정치의 본령 : About Mencius

'맹자'를 읽고 - 도덕적 행위의 가능성과 정치의 본령 : About Mencius

1.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과학적인 논의보다는, 도덕적 행동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모든 인간이 인의예지의 4가지 단서를 갖고 있으므로, 이를 부단히 갈고 닦아 군자가 되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이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 않는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不爲也, 非不能也)
 
2.
맹자의 생각은 인간의 욕망을 긍정함에서 출발한다.
은 무항산하면 무항심이다(無恒産 無恒心) - 경제적으로 삶이 어려우면 온전한 삶도 유지할 수 없고 도덕적 행동의 가능성도 줄어든다.
지도자가 권력을 이용하여 자기 탐욕만 취하여 민이 잘못된 길을 걷게 하고, 그것을 이유로 다시 민을 벌주는 것은 임금이 그물을 쳐서 고기()를 낚는 것과 다름없다.
인이란, 상대방의 입장에서 헤아리는 것을 의미한다. 仁政은 백성의 생계를 보장해주고 교육을 통해 그들을 군자로 길러내는 것이 핵심이다.
 
3.
임금이 인하지 않고 의에서 멀어지면 그들은 도적이다. 임금이 아니다.
민의 소리는 하늘의 소리이고, 이들이 天子(고대의 황제)와 그 밑의 大夫를 내렸다. 오늘날로 치면 민이 대통령과 국회의원, 도지사를 내렸다. 뽑았다.
임금/대통령이 잘못하면, 민이 갈아 엎을 수 있다.
그러나 누구도 민을 갈아 엎을 수 없다.
 
4.
최근 군대폭력/군사쿠데타/위안부사건 등에서 가해자의 시선을 조명하는 시도가 있다. 이러한 시도는 주로 구조적인 악이 있고, 그러므로 일개인에 대한 비난은 삼가야 한다는 것을 요지로 한다. 이는 특정 상황에서의 도덕적 행동의 가능성을 차단한 시선이다. 달리 말하면 윤리적 허무주의다.
오히려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인간이 아닌 동물로만 보는 시선이기도 하다. 그리고 종국에는 약육강식에 대한 정당화만 남는다.
우리는 욕망을 긍정하되, 그럼에도 우리는 공동체의 규범을 준수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구조적인 악의 개선은 심각한 것이지만, 그 선을 한참 넘어가는 개인의 비행도 분명히 존재한다.
 
5.
정치에서 민의 욕망을 부정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정치는 민이 욕망을 실현하는 장이다. 우리 공동체의 현재의 삶을 개선시키는 것이 정치이다. 근본적으로는 재화의 분배곧 경제가 정치고, 민생이 정치다.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정책적 시도나 제도적 개선책이 따르는 것이다.
민의 욕망을 긍정하는 토대에서, 어떤 것을 욕망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바람직한지 혹은 욕망간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설득하는 작업이 바로 정치적 기획이다.
그래서 욕망과 동떨어진 가치만 추구하는 정치담론은 공허하다. .

2014년 6월 23일 월요일

진보사상과 정도전 PROJDJ



1. 모든 인간이 존엄하다는 명제는, 옳은가?

인간은 '존엄'하다.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계획하고 살아갈 수 있기에 존엄하다. 인간앞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고, 그 가능성을 각자의 모습대로 성취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아름답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은 인간이 만든 사상이다. 사상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느낀 것을 체계적으로 정리시킨 것이다. 사상은 사람과 동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판단함에 있어, 이성이 앞서간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대개 감성적인 판단이 앞서며,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성을 사용한다. 사상은 그러한 판단들을 꿰어낸 결과물이다.

인간이 존엄하다는 생각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존엄하다는 생각은 더더욱 그렇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문장속에 이미 '진보'의 결과물이 함축되어 있다. 과거에는 소수의 인간만 존엄했을 뿐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하늘에서 내려온 답이라기보다는, 우리 인간들이 답이라고 '정한 것'이다.


2. 진보란?

간단히 정리하면, 진보는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존엄함의 확대이다.

자유주의, 사회주의, 여성주의, 환경주의, 평화주의, 각종 종교는 인간사회의 억압받는 누군가를 '주체'로 불러낸다. 그리고 그 주체가 억압과 싸울 수 있는 힘과 논리를 제공하여준다. 사회주의는 노동자를, 여성주의는 여성을 불러내는 식이다. 진보로 묶여진 사상들끼리 서로 충돌하는 내용도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존엄성을 확대하고자하는 기획아래에 있다. 각 사상은, 멀리서 보면 진보라는 '집'을 떠받치고 있는 각각의 기둥이다.

진보는 인간의 본성에 역행한다. 인위적인 기획이며, 철저한 사상통제이다. 자연은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흩어지고 사라질 것을 요구한다. 인간은 거기에 맞서 의지에 따라 힘을 모으고 축적하고, 사용한다. 그 힘은 대개 하나의 정점을 향해서 모여왔으며, 대개는 그 정점에 서있는 사람의 자유와 편리함을 위해서 행사된다. 진보는 그에 맞서, 인간은 모두 존엄하므로 그 힘의 행사를 철저히 통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힘의 정점에 서고자 하는 이기적인 욕망과, 힘을 나누어 모두의 존엄을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는 사상 사이의 싸움은, 반복되는 흐름이다.

보수는 '~ 하지 말자', 혹은 '~하더라도 지금은 하지말고 천천히 하자'는 생각이다. 보수는 도올의 말마따나 이념이 될 수 없다. 대개는 진보 사상의 결과물을 훔쳐와서 제것인양 사용한다. 보수가 중시하는 안보나 가족의 가치도 진보사상의 것을 훔쳐온 것에 불과하다. 보수는 대개 피라미드의 정점에 서있는 사람의 말을 듣게 되는데, 그 사람이 대개 진보사상의 결과물만 훔쳐서 사용하여 공동체를 발전시킨다. 그러나 약효과는 대개 한시적이다.

진보사상은 미래가 지금보다 더 나아지리라는 '믿음'에 기초한다. 사람은, 긍정적인 전망이 없다면, 금방 현실에 순응하고 살길을 찾는다. 어떤 사람이 어떤식으로든지 진보사상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 사람의 가슴속에 크든 작든 긍정적인 믿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보수는 그러한 믿음이 없고, 미래는 예측할 수 없고, 세상은 그다지 좋아지지도 않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전망을 한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는 것이 좋고, 무언가를 하더라도 나중에 하자는 것이다. 대신 자신을 위해서 식량은 쌓아두고 스펙은 일단 모아둔다. 보수는, 세상을 좋게 바꿔보자는 기획이 없다.


3. 역사에 기록된 진보사상

나는 우리 역사에서 '진보주의'의 흐름과 기록, 그리고 성취와 패배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우리 역사에서 유의미한 진보의 성과가 있고 또 실패한 상처가 있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출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진보주의에 대하여 가장 먼저 든 의문은, 도대체 북한과 진보는 어떤 관계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달리말하면 왜 일반적으로 보수적인 사람들 상당수는 '진보'라는 말을 들으면 자동적으로 '북한' '친북세력'을 떠올리며, '친일'을 간접적으로 옹호하게 되는지였다. 둘째로, 마르크스주의와 진보는 어떠한 관계인가 하는 것이었다. 셋째로, 그외 여러가지 사상들, 예를 들어 자유주의, 공동체주의, 기독교, 환경주의(?), 여성주의(페미니즘), 평화사상과 진보는 어떠한 관계인가 하는 것이다. 넷째로, 물질적인 발전과 진보사상은 어떠한 관계인가 하는 것이다. 다섯째로,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을 진보라고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런 의문은 체계적인 과정을 통해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일상에서 부딫히는 사람들의 말, 글, 행동을 보며 생긴 의문이었다.

다행히 드라마 '정도전'이 인기를 끌게 되어, 근대사 이전에 어떠한 흐름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숙고할 기회가 생겼다. 드라마 '정도전'과 책 '정도전을 위한 변명'을 보고, 생각을 정리했다. '정도전을 위한 변명'은 기자출신인 글쓴이가 당대의 '정사'를 토대로, 당대의 문집 및 현대의 연구자료를 가미하여 정리한 책이다. 가급적 사료를 토대로 정리하였으며 본인이 상상해낸 부분은 그 상상의 근거를 같이 제시하였다. 드라마 정도전을 본 사람이라면, 책과 드라마의 내용을 비교하며 읽으면 재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음 글에서는 현대의 인물중에서 진보적인 입장에 기반하여 성취를 거둔 김대중의 삶에 대해서 정리해보고자 한다.


4. 정도전의 사상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면서, 왜 민생이 나아지고, 외적의 침입이 줄었을까? 이전에 역사를 공부하며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드라마 정도전을 보면서 문득 든 의문이었다.

답은 정치였다. 고려-조선사이의 변화는 단지 왕조교체가 아니라 집권세력과 제도의 변화였다. 무엇보다도 지도이념의 변화였다. 변화의 중심에는 유교이념으로 무장한 정도전과 사대부가 있었다. 한반도의 국가들은 일찌기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였지만, 조선처럼 철저하게 유교사상을 따르진 않았다. 유교는 통치의 윤리이자 생활의 윤리였다.

'경제'라는 독립된 영역은 없다. 경제는 시장참여자의 의사결정에 따른 결과물인데, 현대 경제에서 가장 큰 참여자는 정부이다. 정부의 역할은 정치영역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다. 혹은 정부가 '개입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가지는 것또한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친다.


  가. '신과 나'의 관계맺음:  '신의 탓'이 아니라 '사람의 탓'이다

유교는 미신을 거부하고 합리주의를 따른다는 특징이 있다. 초자연적인 현상을 설명하더라도 납득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려고 애쓴다. 정도전은 유배 첫해 1375년 12월 '왜 착한 사람은 어렵게 살고 악인은 복을 누리는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다.

정도전은'하늘은 '인'과 '의'를 낳지만, 그것을 실현시키는 것은 하늘이 아니라 사람이다'라는 답을 내린다.

이러한 철학적 정리는 세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정도전은 '우리가 절대 지켜야 하는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긍정한다. 이러한 가치를 무시하고 무도하게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정도전은 우리가 지키고 따라야할 가치가 있음을 강조한다.

둘째, 하늘이 내려준 '선'은 저절로 실현되지 않고 사람에 의하여 실현됨을 갈파한 것이다. 지금 선이 실현되지 않고 있다면 이는 그러한 가치가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그러한 가치가 무의미하다는 것도 아니며, 단지 '사람이 게으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일 뿐임을 강조한 것이다.

셋째, 가장 중요한 것인데, 이러한 정리를 통하여 정도전 본인이 '하늘이 내려준 선'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살 것'을 다짐했다는 것이다.

정도전은 천하에서 악이 판치는 것은 하늘의 탓이 아니라 '사람의 탓'임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이는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눈을 감고 '개인의 탓'을 해야 한다는 보수의 지적과는 차원이 다르다. 구조적 문제이든 개인의 문제이든, 사람의 힘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하늘만 봐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정도전은 '하늘의 뜻'을 위해서 살기로 유배도중에 다짐한 것이다. 이러한 다짐은 10년에 걸친 유배를 거쳐 고려말 백성들이 극도의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람이 유배를 떠났지만 나라를 바꿔야겠다는 다짐을 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그러한 사람 중에서도 '역성혁명'을 수단으로 삼은 사람 또한 극소수에 불과하다. 물론 유교는 '역성혁명'을 이론적으로는 허용하기는 한다.

한편 김대중 또한 '신과 나'의 관계를 정도전과 비슷하게 본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지만 이 세상에는 여전히 악이 있고, 신자는 예수와 함께 그 악을 향해서 싸움을 하는 방식으로 신의 뜻을 받든다는 것이다. 신의 뜻은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그 악에 대항하여 '신과 같은편에 서서 악을 향해 싸우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김대중이 내란음모혐의를 쓰고 사형선고를 받아 감옥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대개 악에 의해서 희생당했다고 여겨지는 자신의 상황에 대한 자기정당화의 과정에서 하게 된다. 동시에,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신앞에 맹세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자신이 신(하늘)의 뜻에 거슬러 살지 않겠으며,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신(하늘)의 뜻을 따라 살겠다는 고백이다. 세상에 판치는 악에 대해서 신(하늘)을 향하여 손가락질 할 것이 아니라, '게으른 나'를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드라마 정도전은 맹자가 말한 '불위야 비불능야'를 인용하는데, 이는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정도전은 인간답게 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살 수 없을 수 밖에 없는 고려말의 구조적인 모습을 보고 분노하고,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 그리고 본인은 불위야 비불능야를 속으로 말하며, 세상을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바꾸지 않았던 것에 불과하다며 자신을 몰아간다.

참고로 김대중이 상정한 인격신인지, 정도전이 상정한 비인격신에 가까운 '하늘'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본인이 신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개인이 유일신교를 믿든, 다신교를 믿든, 무신론자인지와는 관계없이, 본인의 삶의 태도를 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나. 유교의 사상 - 군자의 정치, 애민

한편 책에 소개된 공자의 사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유교에서 정치는 '군자'가 하는 것이다. 군자는 자신을 수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 '다른 사람'이란 가까이는 가족부터 널리 백성까지  포함한다. '사랑'이란, 남의 사정을 배려하는 마음이며, '어질 인'이다. 결국 유교의 정치는 군자가 하는 것이고, 군자만이 할 수 있고, 군자가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군자가 자신을 다스리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 즉 애민하는 것은 정치의 본령이다.

여기에다가 정도전은 맹자의 역성혁명론을 온전히 받아들인다. 백성은 하늘인데, 폭정을 휘두르는 군주인 '폭군'은 곧 군주가 아니라는 이론이다. '폭군방벌론'이다. 대개의 유교사상이 '군주'에 대한 강조로 흐른다면, 정도전은 보다 핵심적인 부분, 즉 정치나 군주나 백성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강조하며, '애민'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백성이 뿌리라는 의미로 '민본'을 강조한다.

애민의 구체적인 실천은 '계민수전'이다. 계민수전은 전국의 모든 토지를 국가소유로 하고 농민에게 가족의 숫자대로 토지를 분배하는 방식이다. 기존의 왕족/귀족의 토지소유를 부정하고 실제로 농사짓는 사람에게 토지를 주자는 것이다. 이는 백성의 생계를 안정시키기 위함이다. 다른한편, 귀족에게 갈 임대료를 국가의 세금으로 전환함으로써 국가재정은 강화된다. 또, 민심을 혁명파로 돌려서 건국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결과적으로 조선은 계민수전에서 후퇴한 과전법을 채택하였으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면서 동시에 이를 정치적 공세수단으로 활용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 레이코프는 하나의 핵심정책을 관철시킴으로써 여러가지 정책을 관철시키는 방식을 찾아야 함을 주장하는데, 정도전 또한 이런 전략을 종종 사용한다.


  다. 국가의 역할에 대하여

정도전의 세금관과 국가관은 근대서구의 사회계약론과 같다. 백성들이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서는 권위있는 통치자가 필요한데, 이 통치자를 부양하기 위하여 세금을 낸다는 것이다. 통치자는 세금의 대가로 백성에게 보답을 해야 한다. 국가는 세금을 받는만큼 백성을 돌봐야 한다.

정도전은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없는노인 등 '네 부류의 고독한 사람들'을 해당 고을에서 우선적으로 돌보도록 했다. 아울러 과도한 세금을 감면하여 1/10수준으로 하였다. 그리고 대명률에 따른 처벌을 강조하여 과도한 형벌권 행사를 금하였다. 백성이 근본이므로 이들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5. 정도전의 실천과 한계 : 민본사상, 재상총재제, 요동경략

  가. 민본사상의 꽃이자 한계인 재상총재제

*재상총재제의 구체적인 실현과 정도전 사후의 제도운영에 대해서는 연구가 부족하므로 언급을 삼간다. 여기에서는 책과 드라마에 표현된 정도전의 구상을 전제로 논의를 진행한다.

민주주의는 국민에게 '주권'이 있음을 선언한다. 이를 암묵적 전제, 흔들려서는 안 되는 전제로 한다. 이는 각 국민이 '주체'로 선다는 의미이다. 국민이 주인이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국가행정을 담당할 수 없으므로, 국민은 선거를 통하여 대표자를 선출하여 나랏일을 맡긴다. 그러므로 선출직 공무원인 대통령, 지자체장, 의원은 민주적 정당성을 갖는다.

민본사상은 '백성이 곧 하늘'이므로 민심을 받들고 따르는 정치를 해야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백성이 하늘이라면 백성이 주체로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은 없다. 이는 각 백성이 힘이 없었던 시대적인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백성은, 이론적으로, 천민이 아닌 양민이라면 유교공부를 통해서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면 정치에 가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관리의 우두머리인 재상이 국정의 최고권한자가 된다.

다만 (정도전 사후) 조선에서는 서자의 과거응시를 금지하여, 정치참여의 통로가 좁아진다. 백성의 입장에서는 과거급제가 신분상승의 기회지만, 적어도 구조상으로는 과거제도와 재상총재제는 백성의 '자기통치'의 실현수단이라고 볼 수는 있다.

그런데 왕은 과거로 뽑히는 것이 아니라 세습되므로 유교이념으로 무장되었다는 보장이 없다. 왕이나 세자들은 강의를 통하여 유교를 가르침받지만, 왕은 폭정을 휘두를 수 있는 가능성이 언제나 있다. 그러므로 정도전은 핵심적인 권력을 왕이 아닌 관리집단에게 부여해야 하며, 이러한 관리의 우두머리인 '재상'이 정부운영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왕은 하늘이 내려주었다는 정당성이 있지만, 재상에게는 어떠한 정당성이 있는가? 재상은 유교원리를 익힌 자이나, 이러한 이념적 배경 외에 실제적인 정당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과거시험을 주최하는 자는 결국에는 왕이다. 구조적으로 왕에게 권력이 몰릴 수 밖에 없다. 권력은 본질적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근대국가가 권력분립을 인위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국회의원과 대통령을 따로 뽑는 방법을 택하지만, 왕과 재상은 그러한 과정도 없다.

왕은 '다른 왕'으로 대체되지 않는 이상, 지금 왕은 여전히 왕이다. 민본의 나라라면, 그리고 백성이 왕을 세운 것이라면, 이론적으로는 백성이 왕을 갈아치울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백성에게 그러할 권리는 없다. 현대국가는 임기제로 대표제를 운영하는데, 이는 국민이 언제든지 대표자를 갈아치울 수 있지만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위해서 임기를 정한 것일 뿐이다.

사실 애초에 왕이 '왕'이 된 것은 강력한 힘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를 '하늘이 내려주었다'는 명분으로 왕의 폭정을 달래고,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로 달래는 것이다. 그러나 왕의 권력의 실상은 물리력에 있다. 백성과 재상이 왕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려면 결국에는 그 '힘'을 동등하게 나눠가졌어야만 했다. 재상총재제는 결국 정당성을 부여받지 못한 명분뿐인 제도라는 한계가 있다.

참고로, 과거제도를 통한 인재등용은 고려시대부터 있었으나 간헐적으로 폐지-부활되었다가, 고려말 신돈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실시된다. 과거급제자는 유교이념으로 무장된 사람이다. 이들은 고려말 '사대부'라는 이름으로 모여 고려의 국정을 비판하였으며, 일부는 고려왕조를 지키자는 입장을 갖는 한편, 다른 일부는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역성파 중 상당수는 서자출신이거나, 가난한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결과적으로 신돈의 기획은 성공한 셈이다. 역설적으로 서자들이 세운 나라인 조선은 이후 사다리 걷어차기를 통해서 서자들의 관직진출을 막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 요동공략-  목적, 정당성, 필요성, 가능성

요동공략 계획과 함께 정도전은 역사에서 사라진다. 정도전은 명나라가 요동을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요동을 정벌할 명분이 있다고 보았고, 이는 국호를 '조선'이라고 칭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애시당초 조선의 발상지는 요동이며, 이후 고구려와 발해가 요동을 번갈아 점령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만주에서 발흥한 거란족의 요나라와 여진족의 금나라가 중원을 경영하였고, 몽골에서 발흥한 원나라가 요동과 중원을 넘어서 세계를 경영하였다. 명나라는 요동이 과거 원나라의 영토였으므로 원을 무너뜨린 명이 그 영토를 지배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였으나, 사실상 중국의 한족이 요동을 경영하였다고 볼 수 있는 시절은 먼옛날이었다. 조선으로서는 발해멸망이후 500년만에 요동경영을 주장할 상황이었던 것은 맞다. 그리고 요동에는 당시 이민족들이 있었고 명이 직접통치하고 있지는 않았으므로, 요동공략은 명나라와의 전면전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었다.

요동공략은 국내정치적인 목적도 있다. 정벌을 위하여 진법훈련을 실시하려면 군대를 하나의 체계로 편입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사병을 없애야 한다. 당시 조선의 관군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세력은 매우 미약하였고, 고려말처럼 세도가들이 사병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었다.

주원장은 조선과 이성계/정도전의 움직임을 극히 경계하고, 정도전과 이방원을 서로 싸우게 하는 이이제이를 통하여 조선의 정치를 혼란에 빠뜨림으로써 요동공략을 막는다. 주원장은 의도적으로 사신으로 온 이방원과 측근들을 환대하고 그에게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요동정벌 세력을 억누른다. 조선-명의 갈등은, 드라마에 묘사된 것 보다 훨씬 심각했다. 그리고 정도전의 중원정벌 계획 또한 드라마보다 구체적이고 위험했다.

요동공략은 신생국가 조선이 부담할 수 있는 짐이었을까? 고토를 회복하기 위하여 전쟁하는 것이 민본사상과 부합하는가? 조선의 안정을 위하여 요동의 여진족을 제압하고 아울러 명나라를 견제할 필요도 있었을 것이며, 궁극적으로 외적의 침입을 선제적으로 저지한다는 점에서 민본을 달성하는 방법이다. 정도전은 특유의 감각으로, 하나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여러개의 과제를 동시에 달성시키는 방법을, 대외문제에 있어서도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역성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룬 것과는 달리, 요동공략에는 실패했다. 드라마와 역사서에서도 묘사되지만, 역성혁명을 이룰때는 동지들을 규합하는 방식이었다. 반대로 요동공략때에는 도리어 동지들과 사이가 소원해졌다. 설득을 얻지 못한 대업은, 결국 대업의 반대파에게 기회를 주었고, 정도전은 그틈에 죽었다. 정도전의 계획도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정도전이 설득력을 얻지 못하여서 실패한 것이다.


6. 끝. 보수파의 재등장 : 개별정책보다는 방향성

이방원은 조선개국공신 중 온건개혁파와 손을 잡고 쿠데타를 일으킨다. 고려말 귀족과도 손잡은 것으로 보이는데, 우현보가 정계로 복귀하는 것은 상징적이다. 정도전은 우현보 가문의 서자 출신이다.

드라마는, 태종이 왕이 된 이후에 정도전의 정책 대부분을 수용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는 진보가 아니다. 보수가 진보의 아이디어를 훔친 것이다.

개별 정책의 채택여부보다는, 어떠한 방향성아래에서 개별정책이 채택되느냐가 중요하다. 예를 들자면 태종이 사병을 혁파하였더라도, 이는 백성의 국가를 위하여 공공성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왕권에 대한 위협을 견제하기 위함이다.(기초노령연금 논쟁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개별정책의 실현은 단기적으로는 백성의 삶을 개선시킨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러한 개선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정책들의 총합과 전체적인 방향성에 달려있다. 같은 관점에서 박정희 시대의 7.4성명은 당시의 흐름과 동떨어져있고 실천된 것도 없으므로 별 의미가 없고, 김대중 이후의 대북정책 패키지는 의미가 있다.

개별정책개발을 소홀히 하더라도 뜻만 좋으면 된다는 주장은 당연히 아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방향성이다. 초기의 논의로 돌아가, 진보냐 보수냐에는 큰 차이가 있다. 본인이 왕이 되어 국가를 잘 경영해보겠다는 이방원이냐, 사욕추구보다는 민본에 뜻을 두는 정도전이냐의 싸움이다. 대개는 추상적인 의식에 기대는 정도전쪽 보다는, 성취동기가 뚜렷한 이방원 쪽이 싸움에서 이긴다. 양쪽다 목숨을 거는 싸움인 것은 똑같은데, 이방원쪽은 자기가 누릴 이익이 명확하므로 동지들을 규합하기도 쉽기 때문이다. 정도전 쪽은 역사에서 이기는 것은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정도전 쪽이 역사에서 이름을 남기지 않고 몽땅 뿌리가 뽑힐것 같지만, 또 그런 것은 아니다. 카인에게 죽음을 당한 아벨이 현재까지 '의인'으로 이름을 남긴다.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그 사람의 행적에 대해서 되새김질되었다는 의미로, 사람들 사이에서 기억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기억을 통해서 성공의 요인을 되짚고 실패의 원인을 분석함으로써, 진보하려고 애쓴다.

정도전이 말한, '모든 백성이 군자가 되는 나라'라는 말은, '모든 국민이 존엄성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도전의 이름이 '도'를 '전하라'는 의미라는 점도 흥미롭다.

꿈을 찾는 정도전의 표정 c) KBS



2014년 5월 5일 월요일

부산에서 제주로: FBTJ



내키지는 않지만,  차를 싣고 제주도에 가야하기에 부산에서 제주로 가는 배를 탔다.

1900에 출발하여 0630에 도착예정. 이제 슬슬 육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파도는 거의 치지 않고 항해는 순조로웠다. 바닷바람은 맞기만 해도 춥다.

세월호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언론에서는 초기에 바다에 뛰어들 경우 수온을 생각하면 최대 3시간 생존가능하다고 했다. 밀폐된 격실에 갖힐 경우 최대 72시간 생존가능하다고 했었다

다 부질없는 얘기였고,
결국 침몰되기전에 구조되었어야 했다.

부산에서 만난 친척은, 1주일동안 세월호뉴스때문에 우울증에 걸린 것 같았다고 했다.

누군들 안 그럴까?

차가운 바닷속에서 생을 마감해야했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들이 오고파했던 섬을 바라보며, 그리고 그 섬을 비행기로 들락날락하며 드는 생각은 여전히 복잡하다.

2014년 4월 23일 수요일

'세월호 사건'에 대하여 - 영화 '시티 홀(City Hall, 1996, 해롤드 베커)' 리뷰와 함께


인간의 육체는 약하다.
그러나 그 인간의 정신은 하늘높이까지 뻗어있다. 
그렇기에 우리들 중 상당수는 '영원한 삶'을 꿈꾸며, 
어찌되었든, 
현재 여건에서는 불가능해보일지라도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기를 늘 소망한다. 

인간의 몸은 땅에 매여있지만, 우리는 늘 하늘을 날기를 원하고 또 물 위를 걷기를 원한다. 
그것이 인간문명이 발전해왔던 방식이며, 
우리가 멸망하지 않는한 이러한 삶은 계속 될 것이다. 


===========

영화 '시티 홀'은 미국 뉴욕 시를 배경으로, 시장과 그의 오른팔, 그리고 한 변호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뉴욕 마피아의 조카가 뒷거래에 의하여서 가석방으로 풀려났고, 그 자의 총을 맞고 한 경찰관이 사망하였고, 등교중인 꼬마아이가 사망한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상부에서 벌어진 모종의 뒷거래로 인하여 범죄의 씨앗이 잉태되었고, 그결과 이 사회에서 가장 정의롭고 열정적인 경찰관 한 명이 죽은 것이다. 
그리고, 가장 순수하고, 또 가능성이 넘치는 꼬마가 죽었다.

이것은 실화를 모티브로 한 것일 수도 있고, 하나의 상징일 수도 있다.

뉴욕 시장인 존 파파스(알 파치노)는 꼬마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열정적으로 추도사를 내뱉는다. 파파스는 오른팔(존 쿠삭)의 롤모델이다. 선한 의도를 갖고 있으며, 치밀하고, 동시에 유능한 지역 정치인이다. 그는 곧 뉴욕 시장을 넘어서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될 가능성도 있는, 사기캐릭에 가까운 인물이다.

주정부는 희생자인 경찰관이 어떠한 '부패'에 연관되어 마피아보스의 조카와 연관되어 있다는 음모를 꾸민다. 일종의 '물타기'가 진행된다. 그 과정에서 시장의 오른팔과 한 변호사가 의심스러운 점들을 하나씩 풀어나간다. 영화의 단초가 된 총기사건은 '우연한 사고'로 보이지만, 사실은 이권사업을 통하여 지역의 표심을 얻고자하는 지역정치인의 욕심과, 무수한 '정치적 거래'를 통하여 부패에 무감각해진 파파스 시장이 원인이다. 

파파스가 '정치적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하여 마피아 조카의 가석방을 추진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여기에는 시장뿐만이 아니라 주 대법관, 유력 정치인, 마피아 보스, 교도소 직원들이 모두 연루되었다는 사실 또한 밝혀진다. 선한 의지를 가진 파파스였지만 '정치적 거래'가 계속 되는 동안 어느 순간 보니 자신이 정한 '선'을 넘었고, 그것을 깨달아버렸지만 돌아올 수 없게 된 것이다. 

오른팔은, 계속해서 파파스의 곁에 있었다면, 아마도 파파스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시켰을 것이고, 파파스를 대선에서 당선시켰을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오른팔은 파파스의 '이너 서클'에 포함되어, 대선후보나 대법관, 유력 정치인들과 놀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는, 오른팔이 새내기 정치인으로 시작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정치인은 꿈꾸는 사람이고, 그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이다.
현실로 만드는 과정에서 대개 '거래'가 수반되기에 처음이 '꿈'을 놓치는 경우가 대다수이지만, 그렇다고 정치와 정치인의 본래 목적을 포기해서는 아니 된다.

오늘 우리 한국사회에는 어떠한 종류의 꿈이 필요할까?
길고 지루한 과정이 되겠지만, 먼저 정부와 회사/정치인간의 기존의 거래구조를 전적으로 바꾸는 방식의 개혁이 필요하다. 아울러 근본적인 차원에서 안전관리/재난예방대책을 재수립하고, 이를 실현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결국 자유로운 토론과 전문가의 의견이고, 당파적인 차원을 넘어서 우리시대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수준 혹은 그 이상의 정책이 수립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어떤 종류의 정치가 행해지길 원하는가? 
그리고 어떤 정치인이 어떤 리더십을 발휘해주길 원하는가?
우리 국민은 결코 '미개'하지 않으며, 
우리들의 가슴에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나라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어하는 꿈이 있다. 이 소박한 꿈은 우리의 가정과 지역사회와 나라를 지켜온 힘이 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서울신문


인간의 육체는 약하지만, 인간의 정신과 이상은 언제나 현실 이상의 것을 꿈꾼다.
우리는 땅을 떠나서는 살 수 없고, 물 속에서는 1분도 호흡할 수 없지만,
오늘 젊은이들과 동생들의 아픔과 죽음을 기억하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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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6일 목요일

또 하나의 가족과, 제가 아는 가족들의 이야기


"시민동지여러분! 이 자리를 지킵시다!"

영화 '변호인'의 거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대사로 기억합니다. '변호인'을 보고도 할 말이 많았습니다. '변호인'은 그 시대를 정말 치열하게 살았던 우리 선배세대의 이야기를 하며, 마지막엔 송우석 변호사와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함께 성장하였음을 보여줍니다.

2014. 2. 6. 오늘, 드디어 '또 하나의 약속'이 정식 개봉했습니다!

'변호인'이 우리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이자 시대의 성장과정을 담은 이야기라면, '또 하나의 약속'은 우리의 현재를 이야기하는 동시에 앞으로 우리시대가 어떻게 성장해갈 것인지를 예언하는 영화입니다. 글의 서두를 굳이 '변호인'으로 시작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두 이야기는 각각 한 시대가 '잃어버린' 혹은 '외면하고싶은' 어떤 사실들을 노래합니다. 그것은, 우리 시대가 '가장 약한자들' '가장 순수한자들'을 희생시켜왔다는 사실이며, 한편으로는 힘을 가진자가 항의하는 목소리들을 억눌러왔다는 사실이며,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는 뭉치고 뭉쳐서 계속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로스쿨 2학년에 재학중이던 2011년 7월 여름실무수습과정을 통하여 이 문제를 직접 접하게 되었습니다. 언론을 통하여 보아왔던 사실들과, 직접 겪었던 3주간의 수습과 현재 직접 보고 듣는 이야기들은 너무도 달랐습니다. 이것이 정말 21세기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대하여도 되는 것인가, 충격적이었습니다.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제가 겪은 사실들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분명히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고, 해결책을 찾아야 하고, 지금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계속하여 피해자가 발생할 것이라는 생각에 때로는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복잡했습니다. 쟁점도 복잡하였습니다. 정의는 혼란스러웠고, 싸움의 역사는 길었고, 등장인물도 많았으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어디까지 이야기하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여러차례 이 문제를 글로 정리하려고 하였으나, 지금까지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것은 그 까닭입니다.

다행히, 이번에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이 개봉하였습니다.
홍리경 감독과 류승진 님, 그리고 많은 분들이 오랫동안 공들인 영화 '탐욕의 제국'도 제작되었습니다.
정말 알기 쉽게 사건을 소개한 만화, 김수박 작가와 김성희 작가의 '사람냄새'와 '먼지없는 방'도 출간되었습니다.
희정작가가 오랫동안 연구하고 밀착취재한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책도 나왔습니다.
박일환 님이 쓴 '삼성반도체와 백혈병'도 있습니다.
이 문제를, 저보다 알기 쉽게 설명한 매체들은 너무도 많습니다.
제가 만화를 좋아해서그런지, 전 만화책을 강추합니다.ㅎㅎ

여하튼 영화를 본 김에, 제가 겪었던 일들과, 저의 감상을 정리..하고자 했지만, 오늘은 본
론을 쓰기에 앞서 자잘한 사실들을 먼저 정리하고자 합니다(글을 길게쓸 엄두가 안 남)



- 아버님은 사투리 억양이 강하지만, 영화에서처럼 약간은 생소한 단어를 자주 쓰시진 않습니다.

- 아버님은 영화에 나오는 것보다 훨씬 더 밝은 분이십니다. 아버님이 우시는 장면이 생각보다 너무 많이 나와서 생소했습니다.

-속초집 내부와 외관은 정말 비슷한 것 같습니다.

- '노무사'님은 충청도 말투에 가깝습니다. 훠얼씬 말이 느립니다. 중요한 얘기할때는 빨라집니다.

- 영화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반올림에는 노동자 건강권을 위하여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활동해온 푸근하면서도 까칠한 형 누나들이 정말 많이 계셨고, 그분들은 저를 정말 많이 갈구고 놀렸지만, 대체적으로 친절하게 이것저것 많이 알려주셨습니다(ㅋ).

- '사무실'은 영화보다 훨~씬 좁았습니다. 경기도 민주노총본부 한쪽 귀퉁이방에서, 다른 노무사 한 분과 겸방을 했고, 옆방에는 회의실로 쓰이는 공간이 있었습니다.

- 전반적으로, 영화가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처음 보는 사람의 입장에선 다소 정보량이 많을 수 있겠다는 느낌. 그리고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100의 긴장감을 갖고 보게해서,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까 진이 빠지더군요.

- 영화에 나오는 환경컨설팅 회사는 'Environ(인바이런)'이라는 회사로, 공단의 1심 일부패소 이후 삼성공장이 유해하지 않다는 자체조사결과 발표 이후에 항소심에서도 그 발표자료가 증거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 중간에 농성장면이 살짝 나오는데, 1심 일부승소 판결 이후 항소포기를 위해서 근로복지공단 점거농성을 한 것입니다(2011. 7.경). 인테리어나 조명 등이 정말 소름끼치게 비슷해서 깜짝놀랐습니다.

- 고 황유미 씨의 사수(맞선배)였다는 '숙x'언니라는 분도 결국 돌아가셨고, 황유미 씨와 함께 1심 승소했습니다.

- 고 박지연 씨의 모델인, 초반에 잠깐 등장하였다가 사망한 여성분은, 87년 생이었고, 생존자 중 최초로 반올림 제보자였으며, 박 씨의 제보 이후 영화속에 등장한 생존자 남성(송창호 님)과 여성(김옥이 님)이 원고로 합류하게 됩니다. 박지연 씨는 2011년 4월달에 사망하였고, 영화에 소개된 바와 같이 사망전후의 여러가지 사정상 거액의 합의금을 받고 소를 취하합니다.

- 황상기 님 외의 원고들, 특히 여성 원고 2분에 대한 묘사는, 음, 영화보면서 정말 깜짝놀랐습니다. 느낌이 너무 비슷해서. 당사자들은 아마 더 놀라지않을까 싶습니다.

- 황상기 님을 비롯한 당사자들은, 영화속에서의 모습보다 더, 당당하고, 씩씩하고, 웃음많은 분들입니다(^^...)

- 영화의 또다른 한 축으로 보이는, 이경영 씨를 비롯한 엔지니어 팀의 이야기 또한 실화입니다. 어떤 엔지니어 팀의 팀장부터 말단 팀원까지 대부분이 희귀병에 걸려서 사망하거나 투병중이라는 사실이 반올림에 제보된 바 있습니다.

- 원고측 증인이 피고측 증인으로 '둔갑'하는 일은 없었지만, 증언을 약속한 원고측 증인이 사라지는 일은 있었습니다. 그분은 어디서 뭐하고 있을까요? 또 원고측이 그토록 세우고자했던 '전문가 증인' 서울대 산학협력단장 백도명 교수는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증언대에 서지 못하였습니다.

-영화적 장치였던 '결정적인 증언'을 통한 '승소'는, 실제 재판에서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증언대에 서서 유리하게 증언해주었던 원고측 증인의 증언은 '신빙성이 없다'는 한 줄만으로 증거로 채택되지 않아, '어린이집 다니는 원고'가 패소하고 말았습니다.

- 개인적으론 '어린이집 다니는 원고' 정애정 님이 영화속에서 보다 충실히 다뤄졌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낭랑하게 말하다가 쌍욕이 나오는 대목에선 다들 빵터지죠. 고 황민웅 님과 정애정 님은 반도체 공장에서 사내연애를 통하여 결혼까지하고 현재 두 아들이 있습니다. 정애정 님이 반올림에 합류한 덕에 반도체 공장내부의 사정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고, 또 좌중을 휘어잡는 입담으로 언제나 분위기메이커 역할을 하셨기 때문이죠...

- 반올림은 애당초에 '대책회의'형식으로 출범했고, 활동가, 피해자, 새로 결합한 활동가 등이 반올림의 이름으로 뭉쳤습니다. 현장활동에 경험이 풍부한 노동 활동가부터,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등 의사들, 학생들, 법조인들, 언론인들, 예술인들, 그리고 가끔 저처럼 어딘가 어리버리한 학생들, 연구자들, 저와달리 빠릿빠릿한 자원활동가들 등등. 그런 사람들이 조약돌처럼 힘을 보태서, 누구 한 명 빠져서는 절대로 지금의 모습이 나올 수 없는, 지금 그 모습이 정겨운 가족같은 반올림의 모습입니다.
















2014년 1월 6일 월요일

노동법 제정과 전진한의 역할


전진한 의원의 사진

1.
이 책을 읽게된 것은 여러가지 우연이 겹쳤기 때문이다.
회사 인터넷 망을 통하여 KISS, DBPIA 등이 접속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사회보장법학회에 실린 글들을 다운받아서 막 읽은 글이, '이흥재' 교수님이 '전진한' 의원을 소개한 글이었기 때문이다.

논문에 실린 전의원의 일생이 나름 흥미로웠기에 전의원에 대해서 검색해보았고, 그러다가 이흥재 교수님이 이 책을 쓴 것을 알게 되었다.


2.
이 책은 법서답지않게,
이흥재 교수가 1954년 어린시절에 전의원을 유세장에서 본 일화로 시작하여,
전진한의 죽음과 사상에 대한 소개로 끝이 난다.


3.
제헌헌법에 '근로자의 이익균점권'이 제정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으며, 그 배경과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그다지 소개된 바 없다.
이러한 논의가 가능했던 의미는, 해방당시 공장의 대부분이 '적산' 즉 일제가 남겨놓고 간 것이었기 때문이다. 애당초에 우리나라의 공장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공업 못지않게 중요하였던 농업에서는 '유상몰수 유상분배'가 대원칙이었고, 공업이나 각종 육체노동의 경우에는 '이익균점' '근로자의 경영참여'가 당시의 화두였다.


4.
이 책은 또한 노동4법- 노조법, 노동쟁의조정법, 노동위원회법, 근로기준법의 제정과정에서 핵심 쟁점이 되었던 부분 및 노동계의원들과 기업가출신의원들의 주요발언을 소개한다.
(지금은 법체계가 달라져서, 노동쟁의조정법의 내용 대부분이 노조법으로 들어와있다)

하이라이트만 소개하면,
- 전국적 파업 즉 이른바 '총파업'을 금지해야하는지? 금지해선 안 된다는 결론.
- 노조가 정치적 목적으로 파업하는 것이 가능한지? 63년 개헌 이전까지는 가능하다는게 우리법의 태도였다. 노조설립목적에 근로자의 경제적 지위향상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향상에 대한 기재가 되어 있는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함.
- 이른바 '파업권'은 단체행동의 자유에 포함되는지? 당연히 포함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이를 명확히 하기 위하여 재차 이를 강조함.
- 노동위원회 구성을 둘러싼 논쟁- 공익위원을 둘것인가 말것인가?
- 근로기준법을 전쟁당시(1953년)에 굳이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실효성 없는 법을 제정하면 사용자들만 범법자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
- 성년여성의 야간근로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것이 타당한가?

숨가쁘게 거듭되는 논쟁을 읽다보면, 어느새 책은 끝나있다.



5.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흥재 교수도 지적하고있거니와, 주로 사용자측의 대변인으로 나온 태완선, 김지태 의원 또한 나름 합리성을 갖고 토론에 임한다는 것이다. 당파적 이익을 떠나서, 헌법정신에 비추어 근로자에게 보장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오히려 그들이 강하게 그 조항을 옹호하기도 한다. '거수기'역할만 하는 현재의 정부여당과는 완연히 비교되는 모습이다.

아울러, '대한노총'이 어떤 조직인지 '조방쟁의'가 무엇인지 '전진한'의원은 어떤 역사적 역할을 했는지 추가적으로 연구하고픈 생각이 든다.



6.
지난 2년간 한국의 근현대사, 특히 사회변혁을 꿈꿨던 거인들의 발자취를 쫓아 나름 학습을 해왔는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우리의 선배들은 대단했다.

















2014년 1월 3일 금요일

작년회고 및 새해다짐

2013년 한해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1월에는 변호사 시험을 보았고 일본여행을 다녀왔다.
2월부터는 변호사시험 결과발표를 기다리며, 서초동에 막 문을 연 '오픈넷'이라는 ngo에서 파트타임 활동가로 일하였다(주3일)- 주로 인터넷상 저작권, 표현의 자유 등과 관련하여 활동을.의원실 방문도 하고, 국회내부토론회 개최도 하고, 아청법 관련하여 시민들을 조직하고 활동을 전개하는 법을 배웠다.
4월에 변호사시험 발표가 났다.
5월에는 가까이 계신 분이, 그리고 많은 사랑을 받던 분이 하늘나라로 가셨다. 3일상을 온전히 지키지도 못하고 논산 육군훈련소에 갔다.
6월에는 훈련소에서 돌아왔고 잠시 휴식후 용인 법무연수원에서 공익법무관 교육을 받았다.
(법무연수원 교육 중 공익인권판례비평대회 편집위원 모집/ 열독모임 홍보 등을 하였고 그것이 결실을 맺어 편집위원들과 함께 글을 편집중이다.)
(인홍의 제안으로 온라인 법률상담- 사법서비스접근권, 그외 전문의견의 저렴한 배포와 관련된 사업에 관하여 구상..)
7월에는 조금 쉴 수 있을줄 알았는데, 법무부에서 법무관들을 미리 나와서 수습을 시키라는 공문을 보낸탓에 열흘정도 일찍 일을 시작했다.
8월부터는 일을 정식으로 시작하면서, 국가배상/부당이득/보훈소송을 지휘/수행중이다.
9월부터는 업무가 적응되면서, 시간을 활용하며 민사집행법/보전소송 등을 공부했다. 영어공부나 일본어공부도 시작했다.
10월 경에 결혼날짜를 잡은 것 같다.


- 간간이 산업재해문제나, 노동법 공부도 하고, 법학과 관련없는 책들도 꽤 읽었지만,
- 변호사시험이 끝난 직후의 긴장감이 1년내내 해소되지 않아 마음에 가는대로 법서를 사고, 손에 집히는대로 책을 읽었다.
- 긴장감과 강박감으로 가득찬 한 해였다.
- 근로기준법 주해 1, 2, 3, 노동조합법, 노동특수이론/업무상재해소송, 로스쿨민법의 맥 등 법서를 잔뜩 사놓은 상태이다.



새해계획
1. 노동법 관련서적 탐독 및 판례연구
2. 산재법 및 사회보장법 연구
3. 세법공부
4. 건강유지
5. 2013년에 읽은 책 서평쓰기(김대중내란음모/ 노동법제정과전진한의역할)

* 기대되는 신혼생활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