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9일 월요일

못난이들끼리는 돕고 살아야 한다: 화차 리뷰

-영화 "화차"(변영주 감독, 2012년 작) 스포를 담고 있습니다.



1. 노래


YB의 "나는 나비"의 가사 일부분.


"추운 겨울이 다가와 힘겨울지도 몰라
봄바람이 불어오면 이제 나의 꿈을 찾아 날아
날개를 활짝펴고 세상을 자유롭게 날거야 
노래하며 춤추는 나는 아름다운 나비"


영화 국가대표의 OST였던 "버터플라이"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태양처럼 빛을 내는 그대여
이 세상이 거칠게 막아서도
빛나는 사람아 난 너를 사랑해
널 세상이 볼수 있게 날아 저 멀리"




2. 무한도전: "타인의 삶" 특집


이 사진 한 장으로 모든 것이 설명될 것 같다.

평범한 남자아이라면 한 번쯤 꿈꿔볼 법한, 운동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
무한도전의 타인의 삶 기획은, "하루 쯤은 자기가 정말 바랬던 삶으로 살아보면 얼마나 재미있을까"라는 근원적인 욕망을 담아낸 기획으로 봤다.

의사로 된 박명수가 스트레스 받는 모습보다는,
천진난만한 정준하의 모습이 더 기억에 남는다.
사실 정말 박명수가 의사가 되고싶었는지는 의심스러웠지만, 정준하는 정말 행복해보였다.



3. "화차"에서 느낀점



누구라면 꿈꿀법한 삶.
적당히 넓은 크기의 집에, 사랑하는 남녀, 안정된 직장, 외모도 둘 다 준수하다.

하지만 여자의 과거 중 대부분은 남자가 모르는 것들로 가득차있다.

어떤 부모를 만날지는 본인이 선택할 수 없다. 아버지가 사채를 썼다. 아버지는 잠적하고, 어머니는 그들에게 살해당했다. 사채로 인해 남편 집이 박살이 나고, 이혼당했다. 그리고 자기는 사창가로 팔려간다.

이 모든 과정은 비극적이지만 현실에서 있을법하다.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는 아니다.
이 영화의 무서운 점은, 그 과정들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는 부분에 있다.
사실 대부분의 과정들에서 그녀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도 그녀의 운명을 도울만큼 바꿔주지는 못한다.

주인공 남자 역시 일반적인 영화와는 달리, 그녀를 구원해주지 못한다.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다'는 대답을 듣고 난 이후에는 매몰차게 버릴 뿐이다. 매몰차다기 보다는 찌질함 그래서 오히려 평범한 모습에 가깝다.

그녀가 단지 그녀라는 이유만으로 도와줬던 사람은 수녀원 언니 뿐이었다.




4.
불편한 진실이지만, 누군가는 나비가 될 기회조차도 가져보지 못하고 애벌레상태에서 짓밟혀버리고야 만다.
달리기로치자면, 출발선에 서볼 기회조차 가지 못하고 삶이 박살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완전한 조건에서 출발한다. 혹은 출발선에 서더라도 '완전히 공정한 조건'같은 것은 애당초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사회에서 더더욱 "스포츠" 광고에 매달리고, 그 중에서도 '인간승리'의 사례를 끄집어내는 것이다.

완벽하게 부모를 잘 만나는 것 (상대적으로 가장 훌륭한 부모를 만나는 것) 그들로부터 좋은 유전자를 물려받는 것이 지금까지 인간사회에서 개인의 행복을 좌지우지해왔다.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인간을 외피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로 보고 아껴주고 사랑하는 길 뿐이다.





5.
인간사회가 이러한 모습이라면, 동물의 왕국과 다를바가 무엇일까?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를 일거에 바꾸는 방법은 있을까?
세상에 한꺼번에 무언가가 바뀌는 것은 없다.
혁명은, 총체적 모순상황에 대한 변혁에 대한 은유라고 받아들여도 좋다.
무력혁명은 그 결과의 선명성 때문에 정말 많은 것이 바뀌는 것 같지만, 실제로보면 또 그렇지도 않다.

그 구체적인 방법론이 무엇이 되었든,
지금 굴러가는 이 사회는 무언가 문제가 있고, 그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고자하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많아져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 나의 옆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죽어감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 자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해야 한다는 점이다.

전태일이 말했던, '너는 또다른 나'라는 말은 사실상 앞서 말한 정신과 같은 내용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도 같은 말이다. (성경에 나오는 사마리아인 비유에 따르면, 나는 병든자/아픈자의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한다) 
전태일은 결코 본인이 배가 고파서 죽은 것이 아니라, 본인은 먹고살만한 지위에 있음에도 평화시장에서 죽어가는 그녀들을 생각했다.

단순히 한 명의 위대한 결단으로 치부한다면 그것은 단지 종교적 숭배에 그칠 뿐이다.
그보다는, 정말로 현실이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누군가의 전태일이, 사마리아인이 되지 않는다면, 누군가는 그 무관심 속에 죽고야 말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보고 살 것인지, 외면하고 살 것인지는 개인의 선택의 영역 즉 매트릭스에서 파란약을 먹느냐 빨간약을 먹느냐의 차이이다. 어떤 알약을 먹고 살지에 대한 선택은 사실 아주 쉬운 일인것처럼 어떤 관점으로 사느냐도 어떤 면에서는 본인이 쉽게 선택할 수도 있는 문제이다.

파란약(현실외면)이냐 빨간약(현실직시)이냐.


"착한 사마리아인" - 페르디낭 호들러 (1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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