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산.
이번 학기에는 몇 가지 기억들이 있다.
하나는, 인권법학회 세미나를 마치고 장터에서 막걸리를 마셨을 때.
그때, 학생으로서 축제와 잠깐의 여유를 찾는 것이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점이 다가왔다.
이제 막 학회에 들어온 4기들과, 2학년이 되어 이제는 로스쿨생같아진 3기생들사이에서,
1년만에 갑자기 나이가 많은 축이 되어버린 나의 위치를 찾는 것도 약간은 어색하고 졸업반이 되었다는 사실이 생소했다.
두번째는, 이윤정 씨의 죽음.
사람의 죽음을 내가 막을 수는 없지만, 못내 여러가지 면에서 아쉬웠다.
1) 작년 11월쯤에 산소통 멤버들과 윤정씨를 병문안 가자는 말이 있었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가지 못햇는데, 그때 다같이 갔었어야 했다.
2) 소송이 진행중인 원고였는데 재판기일에 제대로 심리가 이뤄진 적이 없다. 클리닉에 정신적인 여유가 있었더라면 소송에 있어서 보다 주도적으로 변론속개를 요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삼성 산재사건의 변론을 맡고 계시는 김칠준 변호사님)
세번째는 아마도 지속적인 기억이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지만,
산소통 클리닉의 중흥기(?)를 맞이하였고 여기서 좋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는 부분이다.
우선은, 반올림 활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우발적이었다.
2-30대의 무수한 죽음들을 목도할 수 없었고 거기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자 수습을 지원한 것이었다.
다만 그곳에 가서 보니, 지금까지 지켜봤던 다른 단체들과는 달리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학생들을 조직하여 관련사업을 진행해보자는 생각이었다. 그것이 여러가지 사정들을 거치면서 학교내 공식기구처럼 되었지만.
이 일을 하기 이전에도 좌파적인 마인드가 있었고 또한 나 스스로도 좌파라고 규정짓지만, 좌파이론의 공부를 심도있게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좌파적인 관점에서만 이 문제를 바라보지는 않고 있다. 그것을 어제 MT때 이야기하면서 깨달았다.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는, 더 이상의 억울한 죽음을 막는 것과 앞으로 유사한 일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물론 과거에는 양모산업이 이랬을 것이고, 중공업이, 자동차가, 중화학이 그랬고, 현재는 전자산업이 이런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첨단산업에서의 노동자들이 조직되지 못하여 발생하는 문제들, 혹은 그 이상의 근본적인 원인에서 발생하는 문제들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거시적인 관점을 떠나서,
나는 지금 당장 그 힘든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기를 원한다.
그리고 나의 삶에서 의미있는 부분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다행인 것은 별 생각없이 시작했던 일들이 꼬리를 물면서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로 인하여 여기에 참여하는 학우들이 많아졌다는 점이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은 불과 1년만의 일이다. 그만큼 이 문제가 곪을대로 곪은 문제라는 것이겠지.
참 지금은 홀가분하고 기쁘다. 학회장이 끝났을때만큼 홀가분한 기분.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 - 광야
결국 2년 반의 삶을 돌아보면,
첫 1년은 거의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고, 2008-2010년 인생 최악의 시기의 마지막을 겪으며 바닥 중에서도 바닥을 쳤던 시기,
그 다음 1년은 학회장으로서의 한학기와 산소통 사업을 세우는 과정으로의 한 학기,
그 다음 한학기 역시 정민과 함께 산소통의 자리를 잡아가는 한 학기였구나.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순간순간의 결단이 나중에 보면 크게 삶을 바꿔놓는다.
그 순간순간의 결단은 결국 평소에 길러졌던 생각이나 감수성에서 기초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냐보다는, 자기가 했던 그 순간의 선택들을 믿고, 굳건히 자기의 길을 가면 되는 것이라는 말을, 재원에게 해주고 싶었는데. 그 순간에 그러한 선택을 한 것도 정말 대단한 것이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