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23일 목요일

서평 : <노태우 시대의 재인식> 강원택 편

서평  : <노태우 시대의 재인식> 강원택 편 

1. 노태우에 대하여

최근 노태우 전 대통령 일가가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노태우 씨의 외손녀이자 SK 회장인 최태원 씨의 딸인 최민정 씨가 해군장교로 입대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언론의 주목을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노태우 씨의 딸 노소영 씨의 인터뷰도 인상적이었다. 한편 전두환 추징금이 문제가 되었을 때, 노씨 일가의 재산분쟁 및 추징금 완납이 주목받기도 하였다. 

현재 노태우 씨 본인은 투병 중으로 외부활동을 자제하고 있다. 전두환 씨와는 달리 노태우 씨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내려질 날이 멀지 않아 보인다. 그는 12.12 쿠데타의 주역이자 5월의 광주를 무력으로 짓밟은 주역이다. 이는 대법원에 의하여 확정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편 87년 6월 항쟁과 그에 이은 6.29 선언에서 그의 역할이 얼마나 주도적이었는지도 논란거리이다. 아울러 그에 이은 87년 대선도 부정선거라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 대통령 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수천억 원 규모의 부정축재가 문제가 되었다. 

다만 이러한 과오와는 별개로 그가 대통령으로서 어떠한 직무를 수행하였는지 아울러 그 시대에 발생한 사건들의 의미를 짚어보는 작업은 필요하다. 


2. 외교, 통일분야의 업적

노태우 시대의 성과는 외교적인 성과와 통일 의지였다. 88년 집권당시 냉전기류가 약화되고 있었고 서울올림픽 개최라는 시기를 맞이하여 동구권 국가와의 수교를 서둘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냉전구도가 무너진 이후에는 소련 및 중공과의 수교를 달성하였다. 이는 시대적인 흐름을 미리 읽어내고 선제적으로 대응한 결과이다. 아울러 냉전이 약화됨에따라 한국이 자주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여지가 생겼고, 이는 도리어 외교가 국제정세뿐 아니라 국내정치의 영향을 받게 되기도 하였다(YS의 부활과 박철언의 퇴장). 

아울러 통일의지또한 천명하였는데, 흡수통일이 아닌 교류협력을 전제로 한 평화통일을 목표로 하였다는 점이 현재의 보수와는 다르다. 다만 대북정책은 국내적, 국제적으로 모두 '창구단일화'라고 요약될 수 있다. 이는 DJ때의 외교전략이 미국을 적극적으로 개입시킴은 물론 6자회담을 통한 해결책을 모색했던 것과는 다르다. 노태우 정부는 '자주성'을 키워드로 북미, 북일 수교도 남한을 통하여 할 것을 압박하였다. 아울러 국내적으로도 민간교류나 경제교류를 막고 공안탄압을 하였다. 이는 대화창구를 단일화하여 변수를 최대한 줄이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다만 대북정책을 강화함에 있어 남한의 '힘의 우위'를 강조하고 '북한의 외교적 고립'을 유도하였다. 이는 북한을 압박하여 대화의 테이블로 나오게 하기 위함이었고, 노태우는 이를 '원교근공'이라고 표현한다. 즉 북한과 친한 국가와 수교함으로써 북한을 압박해낸다는 방식이다. 구체적으로는 남한이 소-중과 수교함에 따라 북한에 대한 무기지원을 중단시켰고, 북한의 미-일 채널을 차단하여 남-북대화에 집중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적 고립이 북한의 위기감을 증폭시켜 북한이 핵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게끔 유도하였다. 

이러한 외교, 통일 정책은 '북방외교'라는 한 마디로 집약된다. 논자에 따라 그 정의를 달리하지만, 노태우는 대략 1) 동구권 수교 2) 남북 통일 3) 한민족의 생활권을 만주, 연해주, 시베리아로 확장하는 3단계 구상을 하고 있었다. 이로써 한국이 동북아시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나라가 되길 희망하였다. 노태우의 이러한 민족주의적인 성향은 평시작전권 환수, 용산미군기지 이전 검토, 미군기지 골프장 환수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유화책은 보수의 분열로 이어졌다. 냉전세력 상당수는 노태우나 박철언과는 달리 여전히 적대적인 대북관을 견지하였고, 보수세력 내부에서도 공공연하게 반발이 있었다. 즉 극단적인 친미-반북세력이 정부와 다른 의견을 표출하였고, 이는 레임덕이 가속화된 92년말에 훈령조작 파동에 이르러 정점을 찍었다. 이러한 흐름은 남한이 이미 북한을 압도하였다는 자신감에서 비롯하여 대화보다는 대결을 통한 통일을 선호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특히 세계속의 한국을 인식함에 있어 기존에는 남과 북의 민족문제 해결을 우선시하였으나, 동구권 몰락과 이어진 세계화에 이어 세계속의 한국의 위상이 높아짐에따라 '굳이' 민족문제를 애써서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북한을 고립시켜서 괴멸시키는 것이 낫다는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뉴라이트로 나타났으며 현재 보수정당인 새누리당의 주류적인 사상 또한 이에 기반한다. 


3. 국내정치와 경제문제

87년말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노태우는 88년 초 총선에서의 압승 또한 예상하였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6공화국은 여소야대 국회로 시작하였고, 그리하여 90년 1월 삼당합당이 이뤄지기 전까지 노태우 정부는 정국 주도권을 야당에 내준채로 시작하였다. 이는 야당이 주도가 된 5공 비리 청산 요구, 광주학살 청문회 등으로 이어진다. 아울러 여야합의를 통하여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점진적인 입법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은 고비때마다 법률안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5공 관련 증인소환과 관련된 국정조사법, 노조활동의 자유의 범위를 넓힌 노조법 등에 대하여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이렇게 정국운영에 어려움을 겪은 노태우는 3당 합당을 통하여 정계를 재편하였다. 이로써 지역구도를 공고히 하여 정당의 정책대결은 현재까지 요원해졌으며, 국민이 정치불신 또한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노태우는 표면적으로는 시민사회에 유화적인 정책을 사용하였는바, 원칙적으로는 그의 이해는 정확하였다. 그러나 일정한 범주를 넘어서는 활동, 즉 민간의 통일운동이나 불법적인 노조활동, 특히 전교조 활동은 극렬하게 탄압하였다. 다만 노조활동이 합법적이기 어렵다는 것은 현재까지도 증명되고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그는 적어도 관변단체를 정부의 영향력 밖에 놓아두려고 노력하였고, 노조의 '임금' 투쟁은 어느정도 눈감아주었다. 특히 공권력을 동원한 선제적인 노조탄압은 거절하였고 이는 회사의 자체적인 경찰력의 등장 즉 구사대의 등장을 불러온다. 

특히 경제문제에 있어 노태우 시대에는 관치금융의 부작용을 없애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중화학공업에서 첨단산업으로의 전환을 모색하고 이공계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하였다. 과거에는 국가가 금융을 통하여 경제인들에게 일정산업분야로의 투자를 유도하였는바, 이는 장기적으로는 기업의 경쟁력을 좀먹고 중복투자의 문제를 야기하였다. 다만 금융 자율화 조치에 못지않게 외자유치에 일정한 제한을 두었어야함에도 이를 소홀히하여 향후 IMF 사태의 씨앗을 심기도 하였다. 

아울러 노태우 시대는 세계적인 흐름에 따라 급격한 경제성장이 계속되었고, 중산층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다만 노태우 정부는 적극적인 재분배정책을 사용하기보다는 임금의 상승을 통하여 복지요구를 억눌렀고, 복지정책 또한 대기업중심으로 펴나갔다. 특히 사회보험에 있어 사회보험에 가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만 혜택을 준다는 것을 기본으로 하여, 사각지대의 문제를 야기하기도 하였고 이는 현재까지 이어진다. 특히 노태우 정부는 빈곤정책에 배정된 예산은 오히려 축소하는 악업을 남기기도 하였다. 다만 의료보험의 보장범위확대(농어촌, 도시자영업자)는 주목할만한 성과이다. 

한편 노태우 정부는 인천국제공항, 광양항, 서해안 고속도로, 경부고속철 개발, 국민임대주택 200만호 건설 등 SOC 투자를 공격적으로 하였다. 이는 여야를 막론하고 칭찬받는 대목이다. 


4. 정리

노태우는 DJ와 같이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형 리더라기보다는 최소한 시대에 '역행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애쓴 리더였다. 그는 국내적으로는 민주화 국면에서 6.29 선언을 이끌어냈고 전두환 세력의 복귀를 막고 선거를 통한 정권이양을 도모하였다. 다만 그 역시 5공의 주역이었으므로 5공 청산 요구에는 소극적이었고 그의 세계관에서 어긋나는 시민사회의 요구인 통일운동이나 노조운동은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국제적으로는 동구권 붕괴에 앞서 북방정책을 수립하고 동구권 국가와 선제적으로 수교한 업적을 남겼다. 북한에 대한 적대적 감정에 앞서 평화통일이 현실적인 해법임을 인지한 그의 인식은 높이 평가할만하지만, '창구단일화'는 결과적으로 시민사회의 통일노력이나 미국-일본의 접근을 제약하였고, 북핵개발을 저지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다만 그와는 별도로 한민족의 생활권을 만주 등 북방으로 넓혀야 한다는 적극적인 전략과 친미의존적인 외교전략을 거부한 것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노태우 시대는 국내외적으로 전환기에 있었다.
그는 이러한 전환기의 요구를 수용하고, 점진적인 방향으로 한국을 이끌어간 지도자였다. 적어도 시대흐름에 역행해서는 안 된다는 압박감은 있었다.
그 시대가 만들어낸 모습들은 87년 이후 대한민국 사회의 '원형'을 제공하였다. 




출처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