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4일 토요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진실

지역차별, 계급투쟁, 남북문제, 민주화, 경제발전, 젠더문제 등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우리시대의 모든 논의에서 흔들리지않는 전제는, 인간은 모두 존엄하며, 평등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흔드는 모든 시도에는 단호한 태도를 취해야한다. 민주주의는 이 관점에서 출발한다. 모든 개인은 스스로의 주인이며, 국가는 그러한 개인의 총합이다. 우리의-개인들의 편의상 권력기구가 필요한 것이며, 그 권력이 개인에게 집중될 경우 부패하기마련이므로 권력은 쪼개놓는 것이 좋다. 민주주의는 독재를 반대하고, 평화를 옹호하고 전쟁을 반대한다. 

정치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다수결'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다수가 정한대로 입법이 되므로, 그 과정에서 상대적인 약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가지지 못한자, 여성, 소수인종, 장애인 기타 약자들이 다수의 의견이라는 미명하에 희생되어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민주주의가 모든 개인의 존엄함을 기초로 삼는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독재를 통하여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은 다양하다. 민주화인사, 통일인사, 노동계인사, 여성들, 호남인들, 가지지 못한자들, 장애인들... 그 당시 권력은 집중되어 있었고, 국가의 주인은 한 명이었다. 유신은 권력을 1인으로 집중시키기 위한 계획이었다. 대통령을 주권자인 국민이 직접 뽑는 것이 아니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며, 대통령은 국회와 사법부까지 통제한다. 강조하지만, 독재를 통하여 피해를 입는 양상은 다양하였으나, 독재가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은 하나이다. 그것은 선명한 폭력이다.

2013년도에, 굳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다시 살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김대중은 민주화인사로 꼽히며, 호남출신이고, 남성이며, 남북평화공존이 가능함을 주장하였으며, IMF이후 신자유주의개혁을 하였다고 비난받기도 한다. 굳이 김대중을 다시 봐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은, 이 세상의 어느 시점에 대한민국에서 존재하여왔던 ‘김대중’이라는 자연인을 말살하기 위하여 누군가 꾸민 기획이 아니었다. 이 사건의 시작은 김대중과 박정희가 맞붙었던 71년 대선에 있으며, 박정희의 10월 유신 및 그 이후의 폭압적인 군부통치, 이후 10.26 박정희 대통령 암살과 12.12. 유신 친위쿠데타로 이어진다. 전두환 일당의 친위쿠데타 이후에도 꺼지지 않던 국민의 민주화열망을 말살하기 위한 기획이 바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과 광주민주화운동이다. 광주와 김대중은 하나였다. 상징적으로 하나였던 것 뿐만 아니라, 80년과 81년의 폭압적인 물리적인 폭력을 온몸으로 받아냈다는 의미에서 하나였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다시 보는 이유는, 어느 하나의 관점을 옹호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독재권력이 어떻게 폭력을 행사하는가를 살펴보기 위함이다. 내란음모 혐의로 끌려온 당사자들은 다양했다. 정치인, 종교인, 대학교수, 언론인, 법조인, 학생, 문인... 이들중 상당수는 서로 아는 사람들이었고 상당수는 처음보는 사람들이었지만, 국가는 이들을 하나로 묶어냈다. 그리고 같은 폭력을 가했다. 물리적으로 폭력을 가하였고, 거짓말을 강요하였다. 그리고 동지를 배신하라고 강요하였다. 인간의 존엄을 부인한 것이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것이다.

이 글을 몇번이고 써내려갔지만, 책내용이 도저히 요약되지 않는다. 고문은 진실로 비참했다. 고문은 동지를 배신하게 만들고, 모르는 사람을 아는 사람으로 둔갑시킨다. 육체의 파괴일뿐더러 정신의 파괴이다. 인간성이 박탈되는 것이다. 광주에서는 수백명의 사람이 죽었다. 더 이상의 의미부여는 내가 감당이 안 되니....


-이문영 (당시 고려대 교수): 50-52

돌이켜볼 때에, 지난 세기말 많은 구체제들이 무너지고 경쟁적 정당이 집권했다. 바웬사의 폴란드....중략.....(우리는) 왜 이렇게 늦었고 왜 정부는 약한가? 정부는 국민이 만드는 것이기에 약한 정부를 만든 책임을 한두 사람에게만 물을 수는 없다...중략...다만 여기에서는 5.17 전후의 상황이 이런 약체정부를 어떻게 잉태했었는가를 다음 몇가지로 검출해 보고자 한다.

1. 80 4 14일에 해위(아웅주-윤보선을 가리킴)는 그를 찾은 박영숙(안병무 부인), 이종옥(이해동 부인), 김석중(내 아내- 아웅주-이상 안병무 이해동은 목사임)에게 어느 미국서 온 사람의 말이라 하며 두 사람 중 한 사람 - 후광을 두고 하는 말(아웅주-후광은 김대중을 가리킴)-은 사상이 나쁘니까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5 16일 양 김씨 공동선언의 기초작업에 후광 측으로 참가했더 나는, 거산(아웅주- 김영삼을 가리킴)이 전두환에게 중정부장 서리 겸직을 사임하라고 요구하는 것을 꺼려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아니나다를까 해위는 전두환이 정권을 잡자마자 곧 변절했다. 그는 우리가 교도소에 있을 때 그를 방문한 이해동 부인과 내 아내 앞에서 텔레비전에 비치는 전두환의 얼굴을 가리키면서 "사람이 악하지는 않게 생겼죠"라고 말했다.
                               
2. 정치가들의 생각이 이 정도인데, 정치가들에게 비판적이어야 할 언론인이 정치가들보다 더욱 고루하다는 것을 확인한 곳이 바로 4 25일의 관훈클럽 토론장이었다. 나는 이 토론 참석 이후 왜 십계명에 증거없이 이웃을 비방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독재체제 밑에서 시달렸던 유대인들이 바로 이 터무니없는 비방에 시달렸을 것이 자명하다. 후광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하고 이것만으로 안 되니까 전라도 사람으로 매도했던 것이다.

3. 학계는 어떠했나? 기자를 길러내는 대학의 총장이나 총장을 지낸 사람들은 어떠했나? 자기 밑의 학장을 시켜 나의 복직조건을 한 번도 아니고 여러번 저울질했던 고려대 총장은 피흘린 정권의 초대 총리가 되었다. 이 총장이 학계에만 있을 사람이 아니라고 예언한 헌법학자 유진오는 피 흘린 정권의 국정자문위원이 되었다. 뭔가 이 두 사람이 이상하다고 마음에 걸려 일기에 적어놨더니 과연 내가 교도소에 있는 동안 각각 제 길로 가고들 말았다.


- 송건호 (언론인)

59: 1979년도 저물어가게 되었다. 해마다 10월만 되면 10.24 기념행사가 있다. 이 해도 10.24 기념 행사를 가졌는데, 지금 생각해도 납득이 안 가는 것은 '박정희 이후의 시대'에 대한 정세평가를 한 점이다. 물론 그때 박 정권은 엄존해 있었고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전에 비해 더욱 '단호하게' 힘으로 탄압하고 있었다. 민중의 힘으로 박 정권을 쓰러뜨릴 것 같지는 않았다. 공화당 사람들은 자신만만하기만 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때 해직기자들은 거의 이구동성으로 박 정권 후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78: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모진 고문후유증으로 지금의 파긴슨증후군이란 병을 얻게 되었다. 1992년 가을부터 신체에 이상이 생겨 투병중에 있다가 급기야 1997 7월 합병증이 생겨 지금은 말도 못하고 식사는 위에 직접 호스로 투여하는, 신체를 움직일 수 없는 중병으로 투병중이다.


- 예춘호 (국회의원)

85-86: 1980 3월의 학원은 긴급조치로 해직되었던 24명의 교수들과 373명의 학생들이 복직 복교되어 한동안 전례없이 활기를 띠었다...3 27일 조선대 학생들의 데모를 시발로..학생들의 구호는 '학원 내 언론자유 보장' '어용교수 퇴진' '유신잔당 축출' '학생자치회 부활' '학도호국단 해체' '계엄령 해제' '민주화일정 단축' '재단운영 개선' 등을 내세우다가 4월 중순부터 병영집체훈련의 폐지를 새로운 쟁점으로 내걸고 교내 데모 양상에서 교외로 번지며 점차 과격해지고 있었다.

4월 한 달 내내 전국에 걸쳐 격렬하던 교내시위가...5 1일 동국대와 충남대가 거리로 뛰쳐나와...시국문제를 내걸게 되었고 가두시위로 바뀌었다. 2일에 고려대와 서울대가 교내에서 철야농성을 시작했고 전북대는 중심가에서 경찰과 충돌하여...이때부터 노동3권 보장, 부정축재물 환수, 언론계 각성 등의 구호를 외쳐 주목을 끌었다.

학생들은 교내시위를 통해 정부에 계엄해제와 조속한 국회 주도의 개헌 등을 촉구하면서 9일에 전국 23개 대학 총학생회장회의를 열어 당분간 시류를 관망...그러나 13일 고려대에서 서울시내 27개 대학 대표회의를 열어 14일부터 일제히 가두시위를 벌일 것을 결의했고...전국적인 격렬한 데모는 16일까지 연3일동안 이어졌고....16일 전국 55개 대학 총학생회장들은 이화여대에서 장장 20여시간에 걸친 회의 끝에 과격시위가 정부에 어떤 빌미를 줄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고 17일부터 정상수업을 받기로 원칙을 세우는 등 학생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위해 철야토의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