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든 인간이 존엄하다는 명제는, 옳은가?
인간은 '존엄'하다.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계획하고 살아갈 수 있기에 존엄하다. 인간앞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고, 그 가능성을 각자의 모습대로 성취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아름답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은 인간이 만든 사상이다. 사상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느낀 것을 체계적으로 정리시킨 것이다. 사상은 사람과 동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판단함에 있어, 이성이 앞서간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대개 감성적인 판단이 앞서며,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성을 사용한다. 사상은 그러한 판단들을 꿰어낸 결과물이다.
인간이 존엄하다는 생각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존엄하다는 생각은 더더욱 그렇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문장속에 이미 '진보'의 결과물이 함축되어 있다. 과거에는 소수의 인간만 존엄했을 뿐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하늘에서 내려온 답이라기보다는, 우리 인간들이 답이라고 '정한 것'이다.
2. 진보란?
간단히 정리하면, 진보는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존엄함의 확대이다.
자유주의, 사회주의, 여성주의, 환경주의, 평화주의, 각종 종교는 인간사회의 억압받는 누군가를 '주체'로 불러낸다. 그리고 그 주체가 억압과 싸울 수 있는 힘과 논리를 제공하여준다. 사회주의는 노동자를, 여성주의는 여성을 불러내는 식이다. 진보로 묶여진 사상들끼리 서로 충돌하는 내용도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존엄성을 확대하고자하는 기획아래에 있다. 각 사상은, 멀리서 보면 진보라는 '집'을 떠받치고 있는 각각의 기둥이다.
진보는 인간의 본성에 역행한다. 인위적인 기획이며, 철저한 사상통제이다. 자연은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흩어지고 사라질 것을 요구한다. 인간은 거기에 맞서 의지에 따라 힘을 모으고 축적하고, 사용한다. 그 힘은 대개 하나의 정점을 향해서 모여왔으며, 대개는 그 정점에 서있는 사람의 자유와 편리함을 위해서 행사된다. 진보는 그에 맞서, 인간은 모두 존엄하므로 그 힘의 행사를 철저히 통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힘의 정점에 서고자 하는 이기적인 욕망과, 힘을 나누어 모두의 존엄을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는 사상 사이의 싸움은, 반복되는 흐름이다.
보수는 '~ 하지 말자', 혹은 '~하더라도 지금은 하지말고 천천히 하자'는 생각이다. 보수는 도올의 말마따나 이념이 될 수 없다. 대개는 진보 사상의 결과물을 훔쳐와서 제것인양 사용한다. 보수가 중시하는 안보나 가족의 가치도 진보사상의 것을 훔쳐온 것에 불과하다. 보수는 대개 피라미드의 정점에 서있는 사람의 말을 듣게 되는데, 그 사람이 대개 진보사상의 결과물만 훔쳐서 사용하여 공동체를 발전시킨다. 그러나 약효과는 대개 한시적이다.
진보사상은 미래가 지금보다 더 나아지리라는 '믿음'에 기초한다. 사람은, 긍정적인 전망이 없다면, 금방 현실에 순응하고 살길을 찾는다. 어떤 사람이 어떤식으로든지 진보사상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 사람의 가슴속에 크든 작든 긍정적인 믿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보수는 그러한 믿음이 없고, 미래는 예측할 수 없고, 세상은 그다지 좋아지지도 않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전망을 한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는 것이 좋고, 무언가를 하더라도 나중에 하자는 것이다. 대신 자신을 위해서 식량은 쌓아두고 스펙은 일단 모아둔다. 보수는, 세상을 좋게 바꿔보자는 기획이 없다.
3. 역사에 기록된 진보사상
나는 우리 역사에서 '진보주의'의 흐름과 기록, 그리고 성취와 패배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우리 역사에서 유의미한 진보의 성과가 있고 또 실패한 상처가 있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출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진보주의에 대하여 가장 먼저 든 의문은, 도대체 북한과 진보는 어떤 관계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달리말하면 왜 일반적으로 보수적인 사람들 상당수는 '진보'라는 말을 들으면 자동적으로 '북한' '친북세력'을 떠올리며, '친일'을 간접적으로 옹호하게 되는지였다. 둘째로, 마르크스주의와 진보는 어떠한 관계인가 하는 것이었다. 셋째로, 그외 여러가지 사상들, 예를 들어 자유주의, 공동체주의, 기독교, 환경주의(?), 여성주의(페미니즘), 평화사상과 진보는 어떠한 관계인가 하는 것이다. 넷째로, 물질적인 발전과 진보사상은 어떠한 관계인가 하는 것이다. 다섯째로,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을 진보라고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런 의문은 체계적인 과정을 통해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일상에서 부딫히는 사람들의 말, 글, 행동을 보며 생긴 의문이었다.
다행히 드라마 '정도전'이 인기를 끌게 되어, 근대사 이전에 어떠한 흐름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숙고할 기회가 생겼다. 드라마 '정도전'과 책 '정도전을 위한 변명'을 보고, 생각을 정리했다. '정도전을 위한 변명'은 기자출신인 글쓴이가 당대의 '정사'를 토대로, 당대의 문집 및 현대의 연구자료를 가미하여 정리한 책이다. 가급적 사료를 토대로 정리하였으며 본인이 상상해낸 부분은 그 상상의 근거를 같이 제시하였다. 드라마 정도전을 본 사람이라면, 책과 드라마의 내용을 비교하며 읽으면 재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자유주의, 사회주의, 여성주의, 환경주의, 평화주의, 각종 종교는 인간사회의 억압받는 누군가를 '주체'로 불러낸다. 그리고 그 주체가 억압과 싸울 수 있는 힘과 논리를 제공하여준다. 사회주의는 노동자를, 여성주의는 여성을 불러내는 식이다. 진보로 묶여진 사상들끼리 서로 충돌하는 내용도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존엄성을 확대하고자하는 기획아래에 있다. 각 사상은, 멀리서 보면 진보라는 '집'을 떠받치고 있는 각각의 기둥이다.
진보는 인간의 본성에 역행한다. 인위적인 기획이며, 철저한 사상통제이다. 자연은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흩어지고 사라질 것을 요구한다. 인간은 거기에 맞서 의지에 따라 힘을 모으고 축적하고, 사용한다. 그 힘은 대개 하나의 정점을 향해서 모여왔으며, 대개는 그 정점에 서있는 사람의 자유와 편리함을 위해서 행사된다. 진보는 그에 맞서, 인간은 모두 존엄하므로 그 힘의 행사를 철저히 통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힘의 정점에 서고자 하는 이기적인 욕망과, 힘을 나누어 모두의 존엄을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는 사상 사이의 싸움은, 반복되는 흐름이다.
보수는 '~ 하지 말자', 혹은 '~하더라도 지금은 하지말고 천천히 하자'는 생각이다. 보수는 도올의 말마따나 이념이 될 수 없다. 대개는 진보 사상의 결과물을 훔쳐와서 제것인양 사용한다. 보수가 중시하는 안보나 가족의 가치도 진보사상의 것을 훔쳐온 것에 불과하다. 보수는 대개 피라미드의 정점에 서있는 사람의 말을 듣게 되는데, 그 사람이 대개 진보사상의 결과물만 훔쳐서 사용하여 공동체를 발전시킨다. 그러나 약효과는 대개 한시적이다.
진보사상은 미래가 지금보다 더 나아지리라는 '믿음'에 기초한다. 사람은, 긍정적인 전망이 없다면, 금방 현실에 순응하고 살길을 찾는다. 어떤 사람이 어떤식으로든지 진보사상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 사람의 가슴속에 크든 작든 긍정적인 믿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보수는 그러한 믿음이 없고, 미래는 예측할 수 없고, 세상은 그다지 좋아지지도 않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전망을 한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는 것이 좋고, 무언가를 하더라도 나중에 하자는 것이다. 대신 자신을 위해서 식량은 쌓아두고 스펙은 일단 모아둔다. 보수는, 세상을 좋게 바꿔보자는 기획이 없다.
3. 역사에 기록된 진보사상
나는 우리 역사에서 '진보주의'의 흐름과 기록, 그리고 성취와 패배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우리 역사에서 유의미한 진보의 성과가 있고 또 실패한 상처가 있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출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진보주의에 대하여 가장 먼저 든 의문은, 도대체 북한과 진보는 어떤 관계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달리말하면 왜 일반적으로 보수적인 사람들 상당수는 '진보'라는 말을 들으면 자동적으로 '북한' '친북세력'을 떠올리며, '친일'을 간접적으로 옹호하게 되는지였다. 둘째로, 마르크스주의와 진보는 어떠한 관계인가 하는 것이었다. 셋째로, 그외 여러가지 사상들, 예를 들어 자유주의, 공동체주의, 기독교, 환경주의(?), 여성주의(페미니즘), 평화사상과 진보는 어떠한 관계인가 하는 것이다. 넷째로, 물질적인 발전과 진보사상은 어떠한 관계인가 하는 것이다. 다섯째로,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을 진보라고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런 의문은 체계적인 과정을 통해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일상에서 부딫히는 사람들의 말, 글, 행동을 보며 생긴 의문이었다.
다음 글에서는 현대의 인물중에서 진보적인 입장에 기반하여 성취를 거둔 김대중의 삶에 대해서 정리해보고자 한다.
4. 정도전의 사상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면서, 왜 민생이 나아지고, 외적의 침입이 줄었을까? 이전에 역사를 공부하며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드라마 정도전을 보면서 문득 든 의문이었다.
답은 정치였다. 고려-조선사이의 변화는 단지 왕조교체가 아니라 집권세력과 제도의 변화였다. 무엇보다도 지도이념의 변화였다. 변화의 중심에는 유교이념으로 무장한 정도전과 사대부가 있었다. 한반도의 국가들은 일찌기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였지만, 조선처럼 철저하게 유교사상을 따르진 않았다. 유교는 통치의 윤리이자 생활의 윤리였다.
'경제'라는 독립된 영역은 없다. 경제는 시장참여자의 의사결정에 따른 결과물인데, 현대 경제에서 가장 큰 참여자는 정부이다. 정부의 역할은 정치영역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다. 혹은 정부가 '개입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가지는 것또한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친다.
가. '신과 나'의 관계맺음: '신의 탓'이 아니라 '사람의 탓'이다
유교는 미신을 거부하고 합리주의를 따른다는 특징이 있다. 초자연적인 현상을 설명하더라도 납득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려고 애쓴다. 정도전은 유배 첫해 1375년 12월 '왜 착한 사람은 어렵게 살고 악인은 복을 누리는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다.
정도전은'하늘은 '인'과 '의'를 낳지만, 그것을 실현시키는 것은 하늘이 아니라 사람이다'라는 답을 내린다.
이러한 철학적 정리는 세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정도전은 '우리가 절대 지켜야 하는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긍정한다. 이러한 가치를 무시하고 무도하게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정도전은 우리가 지키고 따라야할 가치가 있음을 강조한다.
둘째, 하늘이 내려준 '선'은 저절로 실현되지 않고 사람에 의하여 실현됨을 갈파한 것이다. 지금 선이 실현되지 않고 있다면 이는 그러한 가치가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그러한 가치가 무의미하다는 것도 아니며, 단지 '사람이 게으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일 뿐임을 강조한 것이다.
셋째, 가장 중요한 것인데, 이러한 정리를 통하여 정도전 본인이 '하늘이 내려준 선'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살 것'을 다짐했다는 것이다.
정도전은 천하에서 악이 판치는 것은 하늘의 탓이 아니라 '사람의 탓'임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이는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눈을 감고 '개인의 탓'을 해야 한다는 보수의 지적과는 차원이 다르다. 구조적 문제이든 개인의 문제이든, 사람의 힘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하늘만 봐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정도전은 '하늘의 뜻'을 위해서 살기로 유배도중에 다짐한 것이다. 이러한 다짐은 10년에 걸친 유배를 거쳐 고려말 백성들이 극도의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람이 유배를 떠났지만 나라를 바꿔야겠다는 다짐을 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그러한 사람 중에서도 '역성혁명'을 수단으로 삼은 사람 또한 극소수에 불과하다. 물론 유교는 '역성혁명'을 이론적으로는 허용하기는 한다.
한편 김대중 또한 '신과 나'의 관계를 정도전과 비슷하게 본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지만 이 세상에는 여전히 악이 있고, 신자는 예수와 함께 그 악을 향해서 싸움을 하는 방식으로 신의 뜻을 받든다는 것이다. 신의 뜻은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그 악에 대항하여 '신과 같은편에 서서 악을 향해 싸우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김대중이 내란음모혐의를 쓰고 사형선고를 받아 감옥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대개 악에 의해서 희생당했다고 여겨지는 자신의 상황에 대한 자기정당화의 과정에서 하게 된다. 동시에,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신앞에 맹세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자신이 신(하늘)의 뜻에 거슬러 살지 않겠으며,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신(하늘)의 뜻을 따라 살겠다는 고백이다. 세상에 판치는 악에 대해서 신(하늘)을 향하여 손가락질 할 것이 아니라, '게으른 나'를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드라마 정도전은 맹자가 말한 '불위야 비불능야'를 인용하는데, 이는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정도전은 인간답게 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살 수 없을 수 밖에 없는 고려말의 구조적인 모습을 보고 분노하고,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 그리고 본인은 불위야 비불능야를 속으로 말하며, 세상을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바꾸지 않았던 것에 불과하다며 자신을 몰아간다.
참고로 김대중이 상정한 인격신인지, 정도전이 상정한 비인격신에 가까운 '하늘'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본인이 신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개인이 유일신교를 믿든, 다신교를 믿든, 무신론자인지와는 관계없이, 본인의 삶의 태도를 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나. 유교의 사상 - 군자의 정치, 애민
한편 책에 소개된 공자의 사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유교에서 정치는 '군자'가 하는 것이다. 군자는 자신을 수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 '다른 사람'이란 가까이는 가족부터 널리 백성까지 포함한다. '사랑'이란, 남의 사정을 배려하는 마음이며, '어질 인'이다. 결국 유교의 정치는 군자가 하는 것이고, 군자만이 할 수 있고, 군자가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군자가 자신을 다스리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 즉 애민하는 것은 정치의 본령이다.
여기에다가 정도전은 맹자의 역성혁명론을 온전히 받아들인다. 백성은 하늘인데, 폭정을 휘두르는 군주인 '폭군'은 곧 군주가 아니라는 이론이다. '폭군방벌론'이다. 대개의 유교사상이 '군주'에 대한 강조로 흐른다면, 정도전은 보다 핵심적인 부분, 즉 정치나 군주나 백성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강조하며, '애민'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백성이 뿌리라는 의미로 '민본'을 강조한다.
애민의 구체적인 실천은 '계민수전'이다. 계민수전은 전국의 모든 토지를 국가소유로 하고 농민에게 가족의 숫자대로 토지를 분배하는 방식이다. 기존의 왕족/귀족의 토지소유를 부정하고 실제로 농사짓는 사람에게 토지를 주자는 것이다. 이는 백성의 생계를 안정시키기 위함이다. 다른한편, 귀족에게 갈 임대료를 국가의 세금으로 전환함으로써 국가재정은 강화된다. 또, 민심을 혁명파로 돌려서 건국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결과적으로 조선은 계민수전에서 후퇴한 과전법을 채택하였으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면서 동시에 이를 정치적 공세수단으로 활용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 레이코프는 하나의 핵심정책을 관철시킴으로써 여러가지 정책을 관철시키는 방식을 찾아야 함을 주장하는데, 정도전 또한 이런 전략을 종종 사용한다.
다. 국가의 역할에 대하여
정도전의 세금관과 국가관은 근대서구의 사회계약론과 같다. 백성들이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서는 권위있는 통치자가 필요한데, 이 통치자를 부양하기 위하여 세금을 낸다는 것이다. 통치자는 세금의 대가로 백성에게 보답을 해야 한다. 국가는 세금을 받는만큼 백성을 돌봐야 한다.
정도전은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없는노인 등 '네 부류의 고독한 사람들'을 해당 고을에서 우선적으로 돌보도록 했다. 아울러 과도한 세금을 감면하여 1/10수준으로 하였다. 그리고 대명률에 따른 처벌을 강조하여 과도한 형벌권 행사를 금하였다. 백성이 근본이므로 이들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5. 정도전의 실천과 한계 : 민본사상, 재상총재제, 요동경략
가. 민본사상의 꽃이자 한계인 재상총재제
*재상총재제의 구체적인 실현과 정도전 사후의 제도운영에 대해서는 연구가 부족하므로 언급을 삼간다. 여기에서는 책과 드라마에 표현된 정도전의 구상을 전제로 논의를 진행한다.
민주주의는 국민에게 '주권'이 있음을 선언한다. 이를 암묵적 전제, 흔들려서는 안 되는 전제로 한다. 이는 각 국민이 '주체'로 선다는 의미이다. 국민이 주인이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국가행정을 담당할 수 없으므로, 국민은 선거를 통하여 대표자를 선출하여 나랏일을 맡긴다. 그러므로 선출직 공무원인 대통령, 지자체장, 의원은 민주적 정당성을 갖는다.
민본사상은 '백성이 곧 하늘'이므로 민심을 받들고 따르는 정치를 해야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백성이 하늘이라면 백성이 주체로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은 없다. 이는 각 백성이 힘이 없었던 시대적인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백성은, 이론적으로, 천민이 아닌 양민이라면 유교공부를 통해서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면 정치에 가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관리의 우두머리인 재상이 국정의 최고권한자가 된다.
다만 (정도전 사후) 조선에서는 서자의 과거응시를 금지하여, 정치참여의 통로가 좁아진다. 백성의 입장에서는 과거급제가 신분상승의 기회지만, 적어도 구조상으로는 과거제도와 재상총재제는 백성의 '자기통치'의 실현수단이라고 볼 수는 있다.
그런데 왕은 과거로 뽑히는 것이 아니라 세습되므로 유교이념으로 무장되었다는 보장이 없다. 왕이나 세자들은 강의를 통하여 유교를 가르침받지만, 왕은 폭정을 휘두를 수 있는 가능성이 언제나 있다. 그러므로 정도전은 핵심적인 권력을 왕이 아닌 관리집단에게 부여해야 하며, 이러한 관리의 우두머리인 '재상'이 정부운영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왕은 하늘이 내려주었다는 정당성이 있지만, 재상에게는 어떠한 정당성이 있는가? 재상은 유교원리를 익힌 자이나, 이러한 이념적 배경 외에 실제적인 정당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과거시험을 주최하는 자는 결국에는 왕이다. 구조적으로 왕에게 권력이 몰릴 수 밖에 없다. 권력은 본질적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근대국가가 권력분립을 인위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국회의원과 대통령을 따로 뽑는 방법을 택하지만, 왕과 재상은 그러한 과정도 없다.
왕은 '다른 왕'으로 대체되지 않는 이상, 지금 왕은 여전히 왕이다. 민본의 나라라면, 그리고 백성이 왕을 세운 것이라면, 이론적으로는 백성이 왕을 갈아치울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백성에게 그러할 권리는 없다. 현대국가는 임기제로 대표제를 운영하는데, 이는 국민이 언제든지 대표자를 갈아치울 수 있지만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위해서 임기를 정한 것일 뿐이다.
사실 애초에 왕이 '왕'이 된 것은 강력한 힘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를 '하늘이 내려주었다'는 명분으로 왕의 폭정을 달래고,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로 달래는 것이다. 그러나 왕의 권력의 실상은 물리력에 있다. 백성과 재상이 왕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려면 결국에는 그 '힘'을 동등하게 나눠가졌어야만 했다. 재상총재제는 결국 정당성을 부여받지 못한 명분뿐인 제도라는 한계가 있다.
참고로, 과거제도를 통한 인재등용은 고려시대부터 있었으나 간헐적으로 폐지-부활되었다가, 고려말 신돈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실시된다. 과거급제자는 유교이념으로 무장된 사람이다. 이들은 고려말 '사대부'라는 이름으로 모여 고려의 국정을 비판하였으며, 일부는 고려왕조를 지키자는 입장을 갖는 한편, 다른 일부는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역성파 중 상당수는 서자출신이거나, 가난한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결과적으로 신돈의 기획은 성공한 셈이다. 역설적으로 서자들이 세운 나라인 조선은 이후 사다리 걷어차기를 통해서 서자들의 관직진출을 막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 요동공략- 목적, 정당성, 필요성, 가능성
요동공략 계획과 함께 정도전은 역사에서 사라진다. 정도전은 명나라가 요동을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요동을 정벌할 명분이 있다고 보았고, 이는 국호를 '조선'이라고 칭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애시당초 조선의 발상지는 요동이며, 이후 고구려와 발해가 요동을 번갈아 점령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만주에서 발흥한 거란족의 요나라와 여진족의 금나라가 중원을 경영하였고, 몽골에서 발흥한 원나라가 요동과 중원을 넘어서 세계를 경영하였다. 명나라는 요동이 과거 원나라의 영토였으므로 원을 무너뜨린 명이 그 영토를 지배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였으나, 사실상 중국의 한족이 요동을 경영하였다고 볼 수 있는 시절은 먼옛날이었다. 조선으로서는 발해멸망이후 500년만에 요동경영을 주장할 상황이었던 것은 맞다. 그리고 요동에는 당시 이민족들이 있었고 명이 직접통치하고 있지는 않았으므로, 요동공략은 명나라와의 전면전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었다.
요동공략은 국내정치적인 목적도 있다. 정벌을 위하여 진법훈련을 실시하려면 군대를 하나의 체계로 편입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사병을 없애야 한다. 당시 조선의 관군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세력은 매우 미약하였고, 고려말처럼 세도가들이 사병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었다.
주원장은 조선과 이성계/정도전의 움직임을 극히 경계하고, 정도전과 이방원을 서로 싸우게 하는 이이제이를 통하여 조선의 정치를 혼란에 빠뜨림으로써 요동공략을 막는다. 주원장은 의도적으로 사신으로 온 이방원과 측근들을 환대하고 그에게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요동정벌 세력을 억누른다. 조선-명의 갈등은, 드라마에 묘사된 것 보다 훨씬 심각했다. 그리고 정도전의 중원정벌 계획 또한 드라마보다 구체적이고 위험했다.
요동공략은 신생국가 조선이 부담할 수 있는 짐이었을까? 고토를 회복하기 위하여 전쟁하는 것이 민본사상과 부합하는가? 조선의 안정을 위하여 요동의 여진족을 제압하고 아울러 명나라를 견제할 필요도 있었을 것이며, 궁극적으로 외적의 침입을 선제적으로 저지한다는 점에서 민본을 달성하는 방법이다. 정도전은 특유의 감각으로, 하나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여러개의 과제를 동시에 달성시키는 방법을, 대외문제에 있어서도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역성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룬 것과는 달리, 요동공략에는 실패했다. 드라마와 역사서에서도 묘사되지만, 역성혁명을 이룰때는 동지들을 규합하는 방식이었다. 반대로 요동공략때에는 도리어 동지들과 사이가 소원해졌다. 설득을 얻지 못한 대업은, 결국 대업의 반대파에게 기회를 주었고, 정도전은 그틈에 죽었다. 정도전의 계획도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정도전이 설득력을 얻지 못하여서 실패한 것이다.
6. 끝. 보수파의 재등장 : 개별정책보다는 방향성
이방원은 조선개국공신 중 온건개혁파와 손을 잡고 쿠데타를 일으킨다. 고려말 귀족과도 손잡은 것으로 보이는데, 우현보가 정계로 복귀하는 것은 상징적이다. 정도전은 우현보 가문의 서자 출신이다.
드라마는, 태종이 왕이 된 이후에 정도전의 정책 대부분을 수용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는 진보가 아니다. 보수가 진보의 아이디어를 훔친 것이다.
개별 정책의 채택여부보다는, 어떠한 방향성아래에서 개별정책이 채택되느냐가 중요하다. 예를 들자면 태종이 사병을 혁파하였더라도, 이는 백성의 국가를 위하여 공공성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왕권에 대한 위협을 견제하기 위함이다.(기초노령연금 논쟁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개별정책의 실현은 단기적으로는 백성의 삶을 개선시킨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러한 개선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정책들의 총합과 전체적인 방향성에 달려있다. 같은 관점에서 박정희 시대의 7.4성명은 당시의 흐름과 동떨어져있고 실천된 것도 없으므로 별 의미가 없고, 김대중 이후의 대북정책 패키지는 의미가 있다.
개별정책개발을 소홀히 하더라도 뜻만 좋으면 된다는 주장은 당연히 아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방향성이다. 초기의 논의로 돌아가, 진보냐 보수냐에는 큰 차이가 있다. 본인이 왕이 되어 국가를 잘 경영해보겠다는 이방원이냐, 사욕추구보다는 민본에 뜻을 두는 정도전이냐의 싸움이다. 대개는 추상적인 의식에 기대는 정도전쪽 보다는, 성취동기가 뚜렷한 이방원 쪽이 싸움에서 이긴다. 양쪽다 목숨을 거는 싸움인 것은 똑같은데, 이방원쪽은 자기가 누릴 이익이 명확하므로 동지들을 규합하기도 쉽기 때문이다. 정도전 쪽은 역사에서 이기는 것은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정도전 쪽이 역사에서 이름을 남기지 않고 몽땅 뿌리가 뽑힐것 같지만, 또 그런 것은 아니다. 카인에게 죽음을 당한 아벨이 현재까지 '의인'으로 이름을 남긴다.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그 사람의 행적에 대해서 되새김질되었다는 의미로, 사람들 사이에서 기억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기억을 통해서 성공의 요인을 되짚고 실패의 원인을 분석함으로써, 진보하려고 애쓴다.
정도전이 말한, '모든 백성이 군자가 되는 나라'라는 말은, '모든 국민이 존엄성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도전의 이름이 '도'를 '전하라'는 의미라는 점도 흥미롭다.
![]() |
꿈을 찾는 정도전의 표정 c) KBS |